이 글은 Claude Fable 5.1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들어가며#

Part 1에서 이 시리즈의 세대 구분을 정했습니다. 이번 편은 그 첫 세대, 1930년대에 태어나 1940~50년대에 드럼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무대가 있었습니다. 서울과 전국의 미군 부대 클럽에서 열리던 미8군 쇼 입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리듬 섹션은 이 무대에서 시작했습니다.

편주제
Part 1개관 — 세션 드러머의 조건, 세대 지도
Part 2 (이 글)1세대 — 미8군 무대와 재즈에서 온 사람들
Part 32세대 — 1970년대 그룹사운드의 드러머들
Part 43세대 — 1980년대 녹음실 세션의 황금기
Part 54세대 — 1990년대
Part 65세대 — 2000년대 이후
Part 7유파 분석 — 계보도와 세대별 음반

1. 미8군 쇼 무대 — 오디션과 등급#

한국전쟁 뒤 미군 부대의 클럽들은 날마다 쇼를 필요로 했습니다. 대중음악 연구자 이용우가 한겨레의 「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 연재에서 정리한 바로는, 미국 본토의 위문공연단만으로는 일상적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1957년 무렵 한국 연예인을 미군 무대에 보내는 용역업체 들이 잇따라 생겼습니다. 화양, 유니버설, 삼진, 공영 같은 회사들입니다. 그전까지 연주자나 팀이 클럽과 따로 교섭하던 것이 이때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는 미군 쪽의 심사 가 엄격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음악사 연구자 박성서의 설명(연합뉴스 2023)에 따르면, 무대에 서려면 미군 부대에서 파견된 쇼 관계자가 심사하는 오디션을 거쳐야 했고, 그 결과에 따라 AA·A·B·C·D 등급 이 매겨졌습니다. 1회 출연료는 AA 140달러, A 120달러, B 100달러, C 80달러로 갈렸고, D 는 탈락이었습니다. 심사 주기는 증언마다 다릅니다. 3개월(박성서), 6개월(이용우), 1년에 두 번(키보이스의 김홍탁) 같은 기록이 모두 있습니다.

밴드에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영남일보의 2017년 기사는 악단을 셋으로 나눕니다.

등급이름활동 범위
1급플로어 밴드전국의 미군 클럽을 순회
2급하우스 밴드특정 부대에 딸린 전속 밴드
3급오픈 밴드아직 오디션을 통과하지 못해 기지촌 클럽에 머무름

클럽도 장교용(Officers), 하사관용(NCO), 사병용(EM)으로 나뉘었고, 빅밴드 편성은 색소폰 다섯, 트롬본 넷, 트럼펫 넷에 기타·베이스·드럼·피아노의 리듬 섹션을 더한 18명 규모였습니다. 쇼는 음악만이 아니라 무용과 코미디, 마술이 섞인 패키지였습니다.

이 제도가 드러머에게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미군 심사관 앞에서 미국의 스윙과 로큰롤, 리듬 앤드 블루스를 원곡에 가깝게 연주해야 등급을 받고 출연료가 올라갔습니다. 1세대 드러머들은 그렇게 미국 대중음악의 리듬을 몸으로 익힌 사람들입니다. 한편 신중현도 1955년 미8군 무대에서 출발했고, 1957년 악단 기타리스트로 데뷔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어 위키백과). 1세대 드러머와 그룹사운드의 뿌리가 같은 무대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2. 최세진 (1931~2008) — 한국 재즈 드럼의 최고령자#

2.1 김정구가 발탁한 중학생#

최세진은 1931년 충북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향신문의 2007년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빅터레코드 특약점을 운영했고, 소년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을 불다가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을 듣고 드럼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몸이 흔들거리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내 몸에 스윙감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드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데뷔는 1947년,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가수 김정구에게 발탁되어 프로 드러머가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박춘석 빅밴드에 들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Sing, Sing, Sing」을 연주 했다고 경향신문은 전합니다. 이후 엄토미 악단과 미8군 쇼밴드를 거쳤습니다.

2.2 홍콩의 15년#

1961년부터 15년 동안 그는 홍콩에 머물며 「더 프로페셔널스」라는 라틴 밴드를 이끌었습니다. 1964년에는 셀로니어스 몽크 쿼텟과 밤새 잼세션을 했다는 기억도 남겼습니다. 1976년 귀국 무렵 그는 한국재즈음악동우회 를 세웠고, 2008년 부고 기사들은 이 모임을 “국내 최초의 재즈 동우회” 로 소개했습니다.

2.3 “호기를 부리지 않는다”#

경향신문은 2007년 그를 “재즈 1세대 밴드의 최고령자” 로 부르며 이렇게 썼습니다. “최고의 ‘스윙감’을 갖고 있는 드러머이지만 연주할 때 호기를 부리지 않는다.” 웃으면서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삶과도 같은 연주를 계속해 나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매주 한 번 재즈 클럽 문글로우에서 연주했고, 1997년 무렵부터 동덕여대와 서울재즈아카데미에 나가 가르쳤습니다.

생애 첫 리더 음반은 일흔이 훌쩍 넘어 나왔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녹음한 『Back To The Future』입니다. 음반 데이터베이스 Discogs 에는 2007년 발매(Rudy Jazz)로, 2007년 11월의 경향신문 인터뷰에는 “지난해” 발매로 적혀 있습니다. 그는 2008년 7월 4일 부천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합뉴스와 경향신문은 향년 77세, 뉴스엔은 78세로 적었습니다.

2.4 음반에 남은 이름#

1세대 드러머의 연주는 대부분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최세진의 이름이 악기별 크레디트로 남은 가장 이른 음반은 『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 — 재즈로 들어본 우리 가요 민요 팝송』 (대한음반, 1978년 녹음·1979년 발매)입니다. Discogs 에 전사된 크레디트에 “Drum: Choi Se Jin”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970년대 가요 음반이 대개 “○○악단” 처럼 악단 단위로만 연주자를 적던 것과 비교하면, 재즈 음반이 개인 크레디트를 먼저 썼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3. 김대환 (1933~2004) — 록 드러머에서 흑우(黑雨)로#

3.1 군악대에서 미8군으로#

김대환은 1933년생입니다. 출생지는 자료가 갈립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와 박성서의 연보는 인천, 신현준의 한겨레21 기사와 최규성의 글은 충남 태안 출생에 인천 외가에서 성장으로 적습니다. 1946년 인천 동산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었고, 1950년대에는 공군 군악대에서 호른과 트롬본을 맡았습니다. 제대 뒤 용역업체 화양 소속으로 미8군 쇼단에 들어갔습니다.

1960년대 초 그는 신중현 과 만났습니다. 1962년 무렵 신중현, 신지철과 함께한 패키지쇼 「클럽 데이트」가 그 시작입니다. 그는 신중현의 애드포 결성에도 참여했지만, 신현준과 최규성의 정리에 따르면 1964년 첫 음반 녹음 직전에 갈라섰습니다. 애드포의 첫 음반 『빗속의 여인』을 친 드러머는 권순근 입니다. 이후 김대환은 1965~66년 KBS(송민영 악단)와 MBC(김호길 악단)의 TV 전속 악단에서 드럼을 쳤고, 1970년 신중현의 「퀘션스」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3.2 김트리오 — 조용필의 첫 리더#

1970년 말, 그는 젊은 기타리스트 조용필, 최이철과 함께 김트리오 를 만들었습니다. 퇴계로의 호텔 밤무대를 위한 팀이었고, 곧 최이철 대신 이남이 가 베이스를 맡았습니다. 1972년 이 팀은 『김대환 드럼생활 20주년 기념 —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아세아레코드)를 냈습니다. 드러머의 이름이 음반 제목에 들어간, 국내 드러머의 리더작 가운데 가장 이른 축에 드는 음반입니다. 1971년 한국연예협회 그룹사운드분과가 생겼을 때 초대 회장을 맡은 것도 그였습니다(연도는 1970·1971·1975 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같은 해 플레이보이컵 경연에서 조용필이 가수왕을 받는 데도 그가 힘을 보탰다고 전해집니다.

김대환이 조용필과 함께한 것은 1980년 이후의 「위대한 탄생」이 아니라 그보다 10년 앞선 김트리오였고, 그 팀의 리더는 조용필이 아니라 김대환이었습니다. 중앙SUNDAY 는 2024년 그를 “신중현·조용필과 함께 활동한 1세대 밴드 드러머이자 한국 프리재즈의 선구자” 라고 소개했습니다.

3.3 “드럼을 잘 못 쳤다”#

이 1세대 드러머에 대해 가장 솔직한 기록은 신현준이 2003년 한겨레21 에 쓴 글에 있습니다. 신중현도 조용필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김대환 선배는 드럼을 잘 못 쳤다.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라서 템포가 빨라졌다.” 신현준은 이것을 본인에게 어떻게 물을지 고심했는데, 묻기도 전에 김대환이 스스럼없이 말했다고 적었습니다. “내가 드럼을 못 쳐서 후배들이 불만이 많았을 것.” 신현준은 그가 “대중음악보다 프리한 음악에 어울린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이었으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뒷날은 그 방향으로 갔습니다. 1978년 외사촌인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 트럼펫의 최선배와 강트리오 를 만들어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10년 동안 프리재즈를 연주했고, 1985년 일본에 진출해 사물놀이와 함께 순회했습니다. 호를 흑우(黑雨) 로 쓰며 낸 음반 『흑우』(1991), 『흑경』(1993)은 드러머가 아니라 타악 솔리스트의 기록입니다. 쌀 한 톨에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에 오른 세서(細書)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2004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고, 소리꾼 장사익이 해마다 3월 1일 추모 공연을 열어 2024년에 20년을 채웠습니다.

4. 조상국 (1939~2013) — “한국 최초의 재즈 드러머”#

1세대 재즈 연주자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2010)를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는 조상국을 “한국 최초의 재즈 드러머” 로 부릅니다. 헤럴드경제는 그가 길옥윤, 박춘석, 엄토미 등과 활동한 1세대 재즈 드러머였다고 썼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 로 이민을 떠났다가, 시사IN 의 2010년 기사에 따르면 30년 만에 귀국해 다시 스틱을 잡았습니다.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이 그의 아들입니다.

최세진과 조상국 가운데 누가 “최초” 인지는 이 글이 판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호칭이 보여 주는 것은, 1950년대의 재즈 드러머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5. 밴드 시대의 첫 드러머들#

1960년대 중반, 미8군 무대에서 빅밴드 대신 5인조 밴드가 등장합니다. 키보이스의 김홍탁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기존의 12~16인조 악단이 선호되던 구조에서 5인조 밴드는 “혁명” 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전환기의 드러머들입니다.

드러머생년기록
권순근1940년 무렵1960년 「스카이 밴드」로 미8군 데뷔. 1964년 신중현과 애드포 를 만들어 첫 음반을 녹음. 1975년 캐나다 이민. 2007년 유튜브에 오른 연주 영상으로 화제가 되었고, 2012년 연합뉴스가 “72세의 늦은 나이에 스타덤에 오른 드러머” 로 소개
윤항기19431959년 김희갑이 악단장이던 미8군 에이원쇼 무대로 데뷔. 키보이스 의 드럼(1964년 『그녀 입술은 달콤해』)
명정강1940~20181962년 여성 밴드 「블루리본」의 드러머. 2018년 부고 기사들은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로 소개. 1965년 신중현과 결혼

(출생 연도는 기사의 나이에서 역산한 것이라 한 해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애드포의 1964년 음반에는 드러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권순근이 쳤다는 사실은 훗날 그의 인터뷰로 확인된 것입니다. 1세대의 연주 기록은 이렇게 음반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 에 의존합니다.

6. 1세대가 남긴 것#

이름생몰출발대표 기록
최세진1931~20081947 김정구 발탁박춘석 빅밴드, 홍콩 15년, 한국재즈음악동우회, 『Back To The Future』
김대환1933~2004공군 군악대 → 미8군클럽 데이트, 퀘션스, 김트리오(조용필), 강트리오, 『흑우』
조상국1939~2013길옥윤·박춘석·엄토미 악단아르헨티나 이민 뒤 귀국, 『브라보 재즈 라이프』
권순근1940 무렵1960 스카이 밴드애드포 첫 음반(1964)
윤항기19431959 김희갑 악단키보이스 드럼

1세대에게서 다음 세대로 직접 이어지는 사제 관계는 기록이 드뭅니다. 최세진이 1990년대 후반부터 동덕여대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는 사실, 김대환이 조용필과 최이철, 이남이를 발굴해 밴드로 묶었다는 사실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그보다 뚜렷한 유산은 무대 입니다. 미8군 쇼의 오디션 제도는 1970년대 그룹사운드 드러머들(다음 편)과 1980년대 세션 드러머들이 똑같이 거쳐 간 관문이었습니다.

마치며#

1세대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미군 심사관 앞에서 미국의 리듬을 증명해야 했던 사람들” 입니다. 최세진은 그 리듬을 재즈로 평생 지켰고, 김대환은 록 밴드의 드러머로는 스스로 부족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용필의 첫 밴드를 만들고 끝내 프리뮤직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 곧 한국 드러머 계보의 첫 갈림길입니다. 재즈 클럽으로 가는 길과, 그룹사운드와 가요 녹음실로 가는 길입니다.

다음 편은 두 번째 길입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을 친 두 드러머, 산울림의 김창익, 사랑과 평화의 김태흥, 그리고 신중현에게 발탁되어 1970년대 가요 세션의 중심이 된 문영배입니다.

편주제
Part 1개관
Part 2 (이 글)1세대 — 미8군 무대와 재즈
Part 32세대 — 1970년대 그룹사운드
Part 43세대 — 1980년대 녹음실 세션
Part 54세대 — 1990년대
Part 65세대 — 2000년대 이후
Part 7유파 분석

References#

  • 이용우, 「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 미8군 쇼 편, 한겨레 — 1957년 무렵의 용역업체와 오디션
  • 연합뉴스, 박성서의 미8군 쇼 설명 (2023-05-27) — AA~D 등급과 출연료
  • 영남일보, 「미8군 무대」 (2017-04-21) — 악단과 클럽의 등급, 빅밴드 편성
  • 조선일보, 키보이스 김홍탁 인터뷰 — 5인조 밴드의 등장, 심사 주기
  • 경향신문, 최세진 인터뷰 (2007-11-29) — 입문, 1947년 데뷔, 홍콩, 몽크, “호기를 부리지 않는다”
  • 연합뉴스 (2008-07-04) · 경향신문 (2008-07-04) · 뉴스엔 (2008-07-05) — 최세진 부고
  • Discogs, 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 — “Drum: Choi Se Jin” · 『Back To The Future』
  • 신현준, 「김대환」, 한겨레21 (2003) — 생애, 애드포 결별, 김트리오, “드럼을 잘 못 쳤다”
  • 최규성, 한겨레 — 애드포 첫 음반의 드러머 권순근
  • 박성서, 뉴스메이커 (2014, 2016) — 김대환 연보, 김트리오 음반의 제작 경위
  • 김대환 (음악인) — 위키백과
  • 중앙SUNDAY, 장사익의 김대환 추모 공연 (2024)
  • 경향신문, 『브라보 재즈 라이프』 소개 (2014-10-27) — “한국 최초의 재즈 드러머 조상국”
  • 시사IN (2010-12-16) · 헤럴드경제 (2016-07-01) — 조상국의 아르헨티나 이민과 귀국, 조윤성
  • 연합뉴스 (2012-10-19) · YTN (2012) — 권순근
  • 윤항기 — 위키백과 · 신중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