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Opus 5.5 를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들어가며#

Part 1에서 앨범의 편성을 한 줄로 늘어놓았을 때, 가운데에 두 곡이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A면의 마지막 곡 「Minuet」과 B면의 첫 곡 「가리워진 길」입니다. 두 곡에는 드럼도, 베이스도, 기타도 없습니다. 조원익도, 유영수와 안기승도 이 두 곡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LP 를 뒤집는 순간을 사이에 두고, 앨범은 대중음악의 리듬 섹션을 잠시 내려놓고 실내악의 편성으로 넘어갑니다.

편주제
Part 1앨범이 만들어진 방법
Part 2「우리들의 사랑」·「그대 내 품에」
Part 3「텅빈 오늘밤」·「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Part 4 (이 글)「Minuet」·「가리워진 길」 — 리듬 섹션이 없는 두 곡
Part 5「지난 날」·「우울한 편지」
Part 6「사랑하기 때문에」
Part 7유산, 그리고 1년 전 리뷰와의 비교

1. Minuet (A5, 2:41)#

1.1 크레디트#

악기연주자
바이올린유현아
비올라정성희
첼로노인경

앨범에서 유일한 연주곡이고, 유재하가 노래도 연주도 하지 않은 유일한 곡입니다. 작곡과 편곡만 그의 몫입니다. 속지에는 곡 제목 옆에 “경음악”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2 3중주인가, 4중주인가#

이 곡의 편성에는 작은 혼선이 있습니다. 원판 속지와 2012년 부클릿의 크레디트는 모두 바이올린 하나, 비올라 하나, 첼로 하나, 곧 현악 3중주1 입니다. 그런데 2017년 한국일보의 두 기사는 이 곡을 현악 4중주 로 적었습니다. 하나는 작곡가 김형석이 “대중가요에서 현악 4중주로만 이뤄진 곡을 처음 들었다” 며 이 곡을 특히 좋아했다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30주기 추모전을 다룬 양승준 기자의 기사입니다. 크레디트를 따르면 3중주가 맞습니다. 다만 3중주든 4중주든, 1987년의 가요 앨범 한가운데에 현악 실내악 한 곡을 그대로 넣었다는 사실이 이 곡의 요점입니다.

1.3 “모차르트를 베껴오면 어떡하는가”#

이 곡의 출발점으로 전해지는 일화가 있습니다. 양승준 기자는 30주기 추모전에서 유재하의 대학 동기들이 잊지 못한다는 작곡 수업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유재하가 과제로 낸 악보를 본 교수가 그것을 집어 던지며 이렇게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베껴오면 어떡하는가!” 그때 만든 곡이 바로 이 「Minuet」이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일화를 두 방향으로 풀이합니다. 유재하의 작곡이 화성과 악절 진행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훌륭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이 두 방향에 걸쳐 있습니다.

  • IZM 의 지운은 이 곡을 “클래식을 전공한 학도다운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소품” 이라고 불렀습니다.
  • 임진모는 2007년 경향신문에서 “앨범 중간에 연주곡으로 수록한 ‘미뉴에트’ 한 곡만으로 그의 독자적 음악영토와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 썼습니다.
  • 박은석은 앨범 전체가 팝 송라이팅의 새로운 전범이라고 하면서, 이 곡만은 “우아한 일탈” 이라고 예외로 두었습니다.

미뉴에트2는 18세기 궁정에서 춤추던 3박자의 무곡이고, 모차르트와 하이든 시대 실내악의 단골 악장이었습니다. 작곡과 학생이 과제로 쓴 고전주의 양식의 소품이, 몇 년 뒤 자기 대중음악 앨범의 A면을 닫는 곡이 된 것입니다.

1.4 앨범 속의 자리#

이 곡이 앨범의 어디에 놓였는지를 보면 그 역할이 보입니다. 바로 앞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신시사이저와 리듬 섹션의 곡이었습니다. 「Minuet」은 그 전자음을 지우고 나무로 된 현악기 세 대만 남깁니다. 그리고 LP 를 뒤집으면 「가리워진 길」이 피아노와 목관, 현악으로 이어받습니다. A면의 팝과 B면의 클래식 편성 사이에 놓인 이음매입니다.

이 곡은 두 번의 헌정 앨범에서 모두 사람의 목소리 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997년 10주기 추모 앨범에서는 인공위성이 아카펠라로 불렀고, 2017년 30주기 앨범을 총괄한 김형석도 “현악의 화음을 사람의 화음으로 표현하려고” 아카펠라를 택했습니다. 악기 셋의 화성이 그만큼 또렷하게 짜여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2. 가리워진 길 (B1, 3:17)#

2.1 크레디트#

악기연주자
피아노유재하
바이올린김은영, 유현아
비올라박해정
첼로김진연
플루트김애란
오보에임정희
클라리넷이광훈
바순김유미
호른이지원

피아노, 현악 4중주(바이올린 둘, 비올라, 첼로), 목관 5중주(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의 열 명입니다. 오보에와 바순은 앨범 전체에서 이 곡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드럼, 베이스, 기타가 하나도 없습니다. 노래가 있는 곡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 목관악기가 가장 많이 쓰인 곡입니다.

2.2 기타 없는 편곡#

이 편곡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짚은 것은 박은석의 2018년 해설입니다. 그는 유재하의 편곡 능력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이 곡을 첫손에 꼽으며 이렇게 썼습니다. “기타 솔로가 마치 의무처럼 삽입되던 시대에 기타 연주를 완전히 배제해버린 ‘가리워진 길’.” 1980년대 가요의 편곡에서 간주는 대개 일렉트릭 기타 솔로의 자리였습니다. 유재하는 그 자리를 목관과 현악에 넘겼습니다. 기타를 앨범의 다른 곡에서 누구보다 능숙하게 쳤던 사람의 선택이라 더 눈에 띕니다.

작곡가 김형석도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회고하며 이 곡을 “목관 5중주의 연주가 입혀진 ‘가리워진 길’” 로 기억했습니다. 한겨레21 은 1997년 기사에서 유재하의 노래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등 풍성한 클래식 반주로 기존 대중가요의 벽을 뛰어넘었다” 고 썼는데, 그 악기 목록이 정확히 이 곡의 편성입니다.

2.3 김현식이 먼저 부른 노래#

「가리워진 길」은 1986년 12월 김현식의 3집 에 먼저 실렸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김현식은 3집을 준비하며 함께하던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에게 각자 노래를 만들어 오면 부르겠다고 했고, 유재하는 다섯 곡을 내밀었습니다. 그 가운데 김현식이 고른 것이 이 곡 하나였습니다. 문화일보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돈이 오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김현식이 전화 한 통으로 동의를 구했을 뿐입니다.

두 판본의 차이에 대해서는 평론가들의 평가가 일치합니다.

김현식 3집 (1986)유재하 (1987)
편곡다소 평이한 구성의 팝클래식 소품 같은 편곡
평가박은석: 지금 들으면 “무미한 범작” 처럼 느껴진다박은석: 편곡자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는 증거

(표의 편곡 묘사는 오마이뉴스 김상화의 비교입니다.)

박은석은 조용필의 「사랑하기 때문에」와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이 무미한 범작으로 느껴지는 것이야말로 유재하가 다른 작곡가들과 얼마나 달랐는지 를 보여 주는 반증이라고 썼습니다. 같은 선율이라도 유재하 자신이 편곡하지 않으면 그 곡의 진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재하가 직접 앨범을 내기로 한 이유가 이 비교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2.4 안개 속의 길#

가사는 앨범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 안개 속에 싸인 길.” 2017년 한국일보는 음악평론가 김성환의 말을 빌려 유재하의 가사를 “격정 대신 사색으로 차분히 써 내려간 노랫말” 이라고 소개하며 이 곡을 예로 들었습니다. 드럼의 박자가 없는 편성은 이 사색의 속도와 맞아떨어집니다. 노래는 박자에 끌려가지 않고, 피아노와 목관이 숨을 고르는 대로 흘러갑니다.

마치며#

LP 의 한가운데에 놓인 두 곡은 앨범이 왜 “클래식과 가요의 접목” 으로 기억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Minuet」은 유재하가 한 음도 연주하지 않고 악보만으로 존재를 증명한 곡이고, 「가리워진 길」은 기타와 리듬 섹션을 모두 덜어내고 피아노와 목관, 현악만으로 대중가요를 완성한 곡입니다. 교수가 모차르트를 베꼈다고 의심했던 학생은, 그 실력으로 1980년대 가요의 관습이던 기타 솔로를 지웠습니다.

다음 편은 B면의 두 곡입니다. 이문세가 코러스를 맡은 「지난 날」, 그리고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연주한 플루트로 시작하는 「우울한 편지」입니다.

편주제
Part 1앨범이 만들어진 방법
Part 2「우리들의 사랑」·「그대 내 품에」
Part 3「텅빈 오늘밤」·「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Part 4 (이 글)「Minuet」·「가리워진 길」
Part 5「지난 날」·「우울한 편지」
Part 6「사랑하기 때문에」
Part 7유산, 그리고 1년 전 리뷰와의 비교

References#



  1. 현악 3중주(string trio):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한 대씩으로 이루어진 실내악 편성입니다. 바이올린이 두 대인 현악 4중주(string quartet)보다 성부가 하나 적어, 세 악기가 각자 더 많은 역할을 맡습니다. ↩︎

  2. 미뉴에트(minuet): 17~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유행한 우아한 3박자 춤곡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셋째 악장으로 자주 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