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Fable 5.1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들어가며#

Part 1 에서 이 시리즈의 1세대를 1970~1980년대로 잡은 이유를 적었습니다. 이 편은 그 20년을 씁니다. 1970년대의 베이시스트는 밴드의 멤버로 음반 뒷면에 이름을 남겼고, 1980년대에는 그 밴드가 그대로 녹음실의 세션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평화에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간 송홍섭, 이장희의 밴드에서 조동진과 유재하의 음반으로 간 조원익, 어떤날에서 동아기획 녹음실로 간 조동익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바깥에서 16년을 돌아 1984년 무렵에야 서울스튜디오에 들어온 신현권이 있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1960년대를 두 문단으로 적습니다.

1. 1960년대 — 콘트라베이스에서 베이스기타로#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이 2018년 한겨레에 쓴 기사에 따르면, 1962년 신중현이 테너 색소폰 신지철, 드러머 김대환과 결성한 미8군 패키지쇼 악단 ‘클럽 데이트’ 에는 “이름을 모르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2명” 이 있었습니다. 2년 뒤인 1964년,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음반으로 꼽히는 애드포의 첫 앨범은 “리드기타 신중현, 보컬 서정길, 드럼 권순근, 베이스기타 한영현” 이 녹음했습니다. 같은 해 정식 1집을 낸 키보이스의 베이스는 차도균이었고, 1969년 김홍탁이 결성한 히식스의 베이스는 조용남이었습니다. 콘트라베이스 두 대가 서 있던 미8군 쇼 무대에서 베이스기타 한 대가 밴드의 음반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2년이 걸린 셈입니다. 재즈 쪽에서도 같은 전환이 있었습니다. 1934년생 이판근은 “1960년 전후 미8군 ‘뉴 스타 쇼’ 에서 색소폰을 연주했지만, 이후 전자 베이스로 악기를 바꿔” 이정식 악단에서 활동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이 악기를 잡은 사람들이 1970년대의 1세대가 됩니다. 1948년생 이남이는 “고교 졸업 후 미8군 무대에서 아마추어 뮤지션으로서 연주 생활을 시작” 해 최헌과 ‘챠밍 가이스’ 를 조직했고, 1954년생 송홍섭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67년부터 베이스 기타를 잡기 시작” 했으며, 1952년생 신현권은 1968년 열일곱 살에 동두천으로 갔습니다. 1971년 김대환이 결성한 김 트리오에서는 조용필과 최이철이 “한쪽엔 기타, 다른 한쪽엔 베이스를 메고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1972년 녹음된 김 트리오의 연주 음반에는 “최이철 대신 들어온 이남이의 베이스” 가 담겼습니다. 이 시리즈의 본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2. 1970년대 — 밴드의 음반에 이름이 적히다#

조원익과 동방의 빛#

Discogs 에 전사된 한국 가요 음반의 가장 이른 베이스 크레디트 가운데 하나는 1973년 이장희의 『그건 너!』 입니다. 베이스 조원익, 드럼 배수연. 스포츠경향 2011년 기사에 따르면 “강근식(기타) 조원익(베이스) 유영수(드럼) 이호준(키보드) 등으로 구성된 ‘동방의 빛’ 은 1973년 이장희의 세션으로 참가했다가 이후 2년간 짧고 굵직한 밴드 활동을 벌인 팀” 이고,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과 1975년 『바보들의 행진』 의 OST 를 맡았습니다.

이장희는 2016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그 녹음실의 방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저랑 음악을 같이 한 밴드 멤버가 기타 강근식 하고 건반 이호준, 베이스 조원익, 드럼 배수연으로 나중 세션과 연주의 레전드가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어떤 ‘짜인’ 틀로 짜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미리 구상하는 이른바 편곡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내가 노래 부르면 조금 있다 강근식이 나타나 기타를 연주하고 그러다가 베이스 조원익이 가세하고 건반이 보태지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곡이 탄생한 거죠. 편곡이 아닌 잼(Jam)하는 형식으로 음악을 완성해갔다고 할까요. — 이장희, 채널예스 (2016-08-30)

편곡자가 악보를 주는 1980년대 녹음실과 달리, 1970년대 초의 베이시스트는 가수 옆에서 라인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원익은 1978년 송창식의 『사랑이야/토함산』 뒷면에도 “김석규, 조원익, 이호준, 배수연의 석기시대” 로 이름을 남겼습니다(최지선, 한겨레 2006). 그의 1980년대는 다음 절에서 다룹니다. 생년과 출신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남이 — 엽전들에서 사랑과 평화로#

이남이는 1974년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 의 베이스 연주자로 영입돼 본격적인 프로페셔널 음악인의 삶을 시작” 했습니다(아시아경제 2010). 엽전들 1집과 2집의 Discogs 크레디트는 모두 “Lee Nam Yee — Bass Guitar” 입니다. 신중현은 2019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신곡 ‘바다’ 를 “그룹 ‘세나그네’ 때 멤버 이남이(베이스기타), 서일구(드럼)와 전국을 돌다 동해를 보고 지은 노래” 라고 소개했습니다.

1977년 이남이는 “기타리스트 최이철, 보컬리스트 이철호 등과 함께 6인조 밴드 사랑과 평화를 결성” 했습니다. 아시아경제의 부고 기사는 이 밴드가 “미8군 내에서 국내 밴드로는 유일하게 ‘특AA’ 등급을 받을 만큼” 연주력으로 이름이 났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1978년 1집 『한동안 뜸했었지』 의 Discogs 크레디트에서 베이스는 이남이가 아니라 Sarvo 입니다. 최지선은 한겨레 「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 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탈리아인과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프랑코 로마노 밴드’ 의 멤버로 송창식의 음반에도 이름을 올린 “슬래핑(초퍼) 주법의 달인으로 통했던 사르보(음반 표기에 적힌 대로라면 본명은 Savatore Cantone)” 가 사랑과 평화의 연주를 도왔고, “이남이나 송홍섭이 가요를 연주했다면 사르보는 팝송을 연주하는 무대에 섰다” 는 것입니다. 실제 녹음에서 누가 어느 곡을 쳤는지는 크레디트 이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시리즈는 크레디트에 적힌 대로 적습니다.

이남이는 1집 뒤 팀을 떠났고, “이듬해 이남이가 탈퇴한 자리를 송홍섭이 대신해 2집” 이 나왔습니다. 1988년 3집으로 돌아와 직접 부른 ‘울고 싶어라’ 가 크게 히트했고, 2010년 1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송홍섭 — 열여섯의 펜더 재즈 베이스#

송홍섭은 1954년생입니다. 스포츠한국 2018년 인터뷰에 따르면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송홍섭은 사진작가이자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로 인해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 했다. 또한 악기와 기계 전반에 해박했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중학교에 들어가던 67년부터 베이스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송홍섭은 미국의 하드록 그룹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을 카피했고 73년 낙원상가에서 처음으로 해외 유명 악기를 구입했는데 그것이 펜더 재즈 베이스다.” OSEN 2017년 인터뷰는 그 앞에 “1970년대 후반 김명길(기타)이 이끌던 록밴드 데블스” 를 둡니다(이 부분은 OSEN 에만 있습니다).

사랑과 평화 가입은 1978년입니다. 1979년 2집 『뭐라고 딱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의 Discogs 크레디트가 “송홍섭 — Bass”, “김태흥 — Drums” 입니다. 송홍섭은 이 밴드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사랑과평화는 전무후무한 팀이에요. 그렇게 완벽한 그룹은 지금도 없습니다. 저도 사랑과평화에서 리듬에 대해 눈을 떴어요. 사랑과평화 이후 리듬에 대한 갈증이 심해서 그때부터 허비 행콕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어요. 웨더 리포트를 공부하느라 몇년 동안 밤을 지샜고, 그래서 제 것이 된 웨더 리포트 리듬이 많습니다. 고등학생이던 한상원과 정원영을 꼬셔서 밴드를 만든 적이 있는데(석기시대) 그때 허비 행콕을 많이 연주했어요. — 송홍섭, OSEN (2017-05-14)

사랑과 평화를 나온 뒤의 밴드에 대해 두 인터뷰의 연도가 다릅니다. OSEN 은 “1980~81년 배수연(드럼), 정원영(키보드), 한상원(기타), 양남기(보컬)의 석기시대” 라 했고, 스포츠한국은 “사랑과 평화 탈퇴후인 82년 종로 국일관에서 정원영, 한상원, 배수현 등과 4인조 밴드로 허비 행콕 등을 연주” 했다고 썼습니다. 이 시리즈는 1980~82년 사이로 폭을 두고 적습니다. 송홍섭의 1980년대는 다음 절의 주인공입니다.

그 밖의 1970년대 이름들#

  • 이태현 (검은나비): 1974년 검은나비 1집의 Discogs 크레디트는 “Lee Tae Hyun — Executive Producer, Bass Guitar”, 드럼 문영배입니다. 베이시스트가 제작자를 겸한 드문 경우인데, 인물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 김창훈 (산울림): 195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농대 재학 중이던 1977년 12월 형제들과 산울림을 결성했고, 1집 『새노래 모음』 의 크레디트가 “김창훈 — Bass Guitar”, “김창익 — Drums” 입니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를 작사·작곡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 이응수·김상복 (송골매): 1979년 송골매 1집의 베이스는 이응수(드럼은 보컬을 겸한 배철수), 1982년 2집의 베이스는 김상복(드럼 오승동)입니다. 김상복의 이름은 뒷세대의 증언에 다시 나옵니다. 이태윤은 대학에 들어가며 산 1978년산 펜더 프레시전이 “당시 송골매의 김상복이 쓰던 모델” 이라고 했습니다.
  • 이수영 (이판근 퀸텟): 1979년 『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 의 크레디트는 베이스 이수영, 드럼 최세진입니다. 이판근 자신이 베이시스트였지만 이 음반에서는 다른 베이시스트를 썼습니다. 이수영의 이력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판근의 교실#

재즈 베이시스트 이판근은 이 시리즈에서 연주자보다 교사 로 더 중요합니다. 2024년 부고 기사(연합뉴스·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서 “미국 유학파들이 번역한 버클리 음대 교재를 구해 독학으로 재즈 이론을 공부” 했고, 1977년 서울 은평구 기자촌으로 이사해 “아래층에 부인이 문방구를 차려 생계를 꾸렸고 위층은 살림집이자 재즈학교” 인 집에서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에게 배운 이름으로 기사는 “정원영, 봄여름가을겨울, 이정식, 김광민, 윤희정” 을 듭니다. 베이시스트 제자의 이름은 기사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원영과 김종진·전태관은 1980년대에 송홍섭·장기호와 같은 녹음실과 밴드에 있었고, 그 연결은 다음 절에 나옵니다.

3. 1980년대 — 녹음실의 베이스 의자#

위대한 탄생 — 김택환에서 송홍섭으로#

조용필은 1979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을 결성했습니다. 스포츠동아 2018년 기사와 한국어 위키백과가 전하는 1기 라인업은 “곽경욱(기타), 김정수(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건반), 이건태(드럼), 이호준(건반 객원멤버)” 입니다. 1982년 4집의 Discogs 크레디트가 “김택환 — Bass Guitar”, “이건태 — Drums” 입니다. 김택환에 관한 기록은 이 크레디트와 뒷세대의 평가뿐입니다. 김학선은 조용필의 최고 명곡으로 ‘자존심’ 을 꼽으며 “이 노래에 김택환의 베이스를 비롯한 위대한 탄생의 연주가 없었다면 그 맛은 훨씬 반감됐을 것” 이라고 썼고, 이태윤은 “김택환 님은 1980년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에서 연주했던 명 베이시스트죠” 라고 했습니다.

송홍섭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1983년 무렵입니다. 스포츠한국은 “83년부터 87년까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로 활동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5집부터 9집까지 참여했다. 그중 7집은 그 자신이 편곡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음악 전반 디렉터 역할까지 했다” 고 적었습니다(OSEN 은 1982~85년). Discogs 로 확인되는 것은 1984년 6집(베이스 송홍섭, 드럼 백천남)과 1985년 7집(베이스·편곡 송홍섭, 드럼 김정위)입니다. 7집에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가 실린 경위도 송홍섭에게서 나옵니다. OSEN 에 따르면 “그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시절 당시 한양대생이었던 유재하를 건반주자로 발탁, 유재하가 작곡한 ‘사랑하기 때문에’ 를 조용필 7집에 수록케” 했습니다.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가 누린 조건은 Part 1 에서 적은 월급제입니다. 송홍섭은 조용필에 대해 “그는 음악으로 돈을 버는 족족 악기 사는데 다 써버렸어요. 외국에 공연 가면 현지에서 받은 개런티로 악기 사는데 다 쓸 정도였죠. 위대한 탄생의 최고 퀄리티의 사운드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송홍섭 사단 — 편곡가가 데리고 다니는 리듬 섹션#

1980년대 후반의 녹음실은 편곡가의 시대였습니다. 김학선의 프레시안 글이 그 구조를 적어 두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연주자들은 거의 반년 치 일정이 미리 짜여 있었다고 한다. 이호준이나 김명곤, 송홍섭 등 대표적인 편곡가들은 마음이 맞는 연주자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창작된 곡들을 꾸몄다. (…) 가령 1980년대 후반 송홍섭이 편곡을 맡은 작품에는 어김없이 박청귀(아라이), 이병우 등이 기타 연주를 했다. 키보드는 주로 황수권이, 드럼은 김희현이나 배수연이 연주했다. — 김학선, 프레시안 (2024-03-09)

같은 글은 1988년 김현식 4집의 ‘여름밤의 꿈’ 이 “송홍섭 사단의 연주 덕분에” 제목이 품은 이미지를 얻었다고 평합니다. 이 사단의 드럼이 김희현과 배수연이라는 사실은 어제 드러머 시리즈 Part 4 에서 확인한 그대로이고, 베이스는 편곡자 자신인 송홍섭이었습니다. 베이시스트가 편곡자가 되면 리듬 섹션 전체를 자기 손으로 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송홍섭이 1980년대에 연 길입니다.

Discogs 로 확인되는 송홍섭 사단의 녹음은 1989년 장필순 1집 『어느새』 입니다. 베이스 송홍섭·조동익, 드럼 김희현·배수연, 편곡은 김현철·손진태·송홍섭이 나눠 맡았습니다. 크레디트가 트랙별로 나뉘어 있지 않아 누가 어느 곡을 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OSEN 은 송홍섭이 “김현식 1집에 이호준 배수연 김양일 등과 함께 세션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동아기획에서 나온 김현식 4~6집, 역시 동아기획에서 나온 한영애 2집과 이후 나온 3,4집, 봄여름가을겨울 앨범 등의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고 적었습니다. 이 음반들은 Discogs 에 연주자 크레디트가 없어 기사 서술로만 남깁니다. 1990년 송스튜디오 설립 이후는 Part 3 에서 다룹니다.

조원익 — 조동진에서 유재하까지#

동방의 빛의 조원익은 1980년대에 포크와 언더그라운드 음반의 베이시스트가 되었습니다. Discogs 크레디트가 이어집니다. 1983년 조동진 『Golden Album』(드럼 유영수),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과 따로또같이 II(드럼 안기승), 1985년 조동진 3집(드럼 안기승). 안기승과 짝을 이룬 세 장은 모두 1984~85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입니다. 이 블로그의 유재하 시리즈에서 원판 LP 속지로 확인한 크레디트는 베이스 조원익, 드럼 유영수·안기승입니다. 조원익은 이 음반의 제작자이기도 했습니다. 동아기획의 김영은 2005년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조원익이란 친구가 음반 홍보를 잘못해서, 음반이 잘 팔리지 않았다. — 김영, 세계일보 (2005)

음반의 소개말에서 유재하는 조원익을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선배로 따로 적어 감사를 표했습니다. 2026년 9월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기사는 최성원의 SNS 회고를 전하며, 들국화 1집 녹음을 앞두고 최성원이 “동료이자 베이시스트 선배인 조원익” 을 찾아가 “1960년대 빈티지 펜더 재즈 베이스를 무작정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고 썼습니다. 당사자의 SNS 를 시민기자가 옮긴 2차 자료이므로 그렇게만 적어 둡니다. 조원익은 1992년 조동진·조동익과 하나음악을 설립했고(한국어 위키백과), 2008년 무렵 울릉도에 정착해 초등학교 방과후 교사로 악기를 가르쳤습니다(스포츠경향 2011).

동아기획과 조동익#

1960년생 조동익은 조동진의 동생입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등학교 졸업 뒤 이화여대 앞 카페 ‘뮤직 모노’ 의 DJ 로 한영애·전인권·한상원을 만났고, 1984년 이병우와 ‘어떤날’ 을 결성해 최성원의 기획으로 1986년 『어떤날 I』 을 냈습니다. 그 음반의 크레디트가 “조동익 — Electric Bass, Fretless Bass, Synthesizer, Percussion, Vocals”, 드럼 안기승입니다. 이후 “주로 동아기획의 녹음실에서 스튜디오 세션과 편곡 일을 병행” 했다는 위키의 서술은 Discogs 크레디트로 뒷받침됩니다. 1986년 시인과 촌장 2집 『푸른 돛』(베이스 조동익, 드럼 김영석, 기타 함춘호·이병우), 1989년 김현철 1집(베이스 조동익, 드럼 김희현), 1989년 이원재 『혼자 내리는 비』(베이스 조동익, 드럼 김희현), 1989년 장필순 1집.

동아기획이 어떤 녹음실이었는지는 김영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레코딩에 대한 돈과 시간의 투자, 음악인에 대한 배려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음반에 담기는 내용물에 치중했다.” 조동익이 그 녹음실에서 베이시스트에서 편곡자로 옮겨 간 과정은 1990년대의 이야기이고, 김작가가 쓴 “고 김광석의 2집부터 마지막 앨범까지 조동익의 손을 탔다” 는 대목과 함께 다음 편에서 다룹니다.

밴드의 베이시스트들#

1980년대 밴드의 베이시스트 가운데 크레디트가 남은 이름들입니다.

  • 최성원 (들국화): 1954년 부천 출생, 고려대 물리학과. 한겨레의 최지선에 따르면 이장희의 ‘락컴퍼니’ 가 “사랑과 평화를 비롯, 김현식, 최성원, 이승희, 이영재 등을 육성” 했고, 이장희가 떠난 뒤 광화문 ‘랩스튜디오’ 에서 최성원이 기획한 『우리노래전시회』(1984)가 태동했습니다. 1985년 들국화 1집은 Discogs 에 연주자 크레디트가 없고, 1986년 2집의 크레디트가 “최성원 — Bass”, “주찬권 — Drum” 입니다.
  • 장기호 (사랑과 평화 → 빛과 소금): 1961년 서울 정릉동 출생. 한국어 위키백과는 1985년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와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을 결성했다고 적고, 사랑과 평화 4기의 베이스로 이름을 올립니다. 2022년 뉴스토마토 인터뷰에서 장기호는 재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당시 교복 입은 종진(봄여름가을겨울)이가 히피머리 하고 ‘형’ 하면서 따라왔던 생각도 나고요. 태관(봄여름가을겨울)이랑 재하(유재하)가 또 친구였고, 김광민, 한상원… 마이클 프랭크스 같은 음악을 들으며 ‘동아리’ 처럼 만나 음악하던 그 시절.” 같은 인터뷰에서 박성식은 “70년대에는 대중음악보다 교회 성가 수준이 굉장히 높았어요. 그래서 저나 기호나 고등학교 때까지 자연스럽게 거기서 음악 공부를 하게 된 거죠” 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베이시스트의 관문이 된 가장 이른 증언입니다. 빛과 소금 1~3집은 Discogs 에 연주자 크레디트가 없습니다.
  • 이수용: 1987년 이문세 4집과 1989년 6집의 베이스입니다. 두 장 모두 드럼은 배수연입니다. 인물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 김병찬 (부활 1집, 1986), 조용남 (불나비, 1983 — 히식스 출신), 조용식 (윤수일 밴드 III, 1984), 이원재 (신촌블루스 II, 1989): 모두 Discogs 크레디트로만 확인됩니다. 부산일보는 1989년 신촌블루스 라이브 앨범의 연주자들을 “엄인호(보컬, 기타), 오태호(기타), 이원재(베이스), 정태국(드럼), 김명수(키보드), 이창수(키보드), 엄인환(색스폰) 등 80년대의 명망 있는 세션들”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같은 해 솔로 음반을 낸 포크 가수 이원재와 동일인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현권 — 동두천에서 서울스튜디오까지 16년#

1세대의 마지막 자리는 가장 늦게 녹음실에 들어온 사람의 것입니다. 1952년 전북 남원 출생 신현권은 서울예고에 트롬본 특기생으로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1968년 열일곱 살에 “홀로 시외버스를 타고 동두천으로” 갔습니다. 김현성이 2018년 채널예스에 쓴 칼럼이 그의 말을 옮깁니다.

대낮부터 밴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 읍이니까 거리가 2,3백 미터 밖에 더 되겠어. 골목길에 클럽이 한 백 개는 됐나? 엄청 많더라고. 저녁에 오픈하는데 낮에 밴드들이 연습하는 거야. 제일 멋있는 데로 무조건 들어갔지. 그냥 맨 몸으로. 좀 써 달라고. — 신현권, 채널예스 (2018-03-16)

김현성은 미8군이 “음악 공부의 엘리트 코스처럼 회자되지만 실상은 청소나 미군들의 심부름을 비롯한 클럽 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고된 생활” 이었다고 쓰고, 신현권이 “그렇게 8년을 보냈다” 고 적었습니다. 그 뒤로도 “변두리 지역의 클럽이나 주점에서 ‘오부리’ 밴드로” 일하는 동안 “중학교 동창인 김명곤이 ‘사랑과 평화’ 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얻고 송홍섭이 이십대 초반에 베이시스트로 중앙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스포츠한국 2024년 인터뷰에는 1976년 무렵 낙원상가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던 그에게 담당자가 “딴 사람 없어? 베이스 못 치게 생겼는데…”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중앙’ 에 들어온 경위는 이렇습니다. “동두천을 찾아간 때로부터 16년이 지난 1984년 무렵이었다. ‘히식스’ 의 리더 김홍탁이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나면서 남은 멤버들이 새로 밴드를 결성하려는데 베이스 자리가 빈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재결성된 그룹사운드 ‘히파이브’ 의 멤버로 합류했다. (…)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 스튜디오의 전속 연주자로 발탁되었다. 이때부터 당대의 주요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게 되었고 불과 2~3년 사이에 정상급 세션 연주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스포츠한국은 “1982년 서울스튜디오에서 작업한 트랙이 생애 첫 녹음 세션” 이라고 적었고, 스포츠경향 2016년 기사는 “1970 종반 이후부터는 레코딩 전문 프로 베이시스트” 라고 써 시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 시리즈는 “1982년 첫 녹음, 1984년 무렵 전속” 으로 적습니다. Discogs 로 확인되는 1980년대 크레디트는 1989년 김수철 『황천길』(드럼 배수연)입니다. 그의 전성기는 다음 편의 처음입니다.

다음 세대의 출발#

1964년생 이태윤은 이 시기에 밴드에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까지 드럼을 치다가 베이스를 치던 친구와 포지션을 바꿨고, 1973년산 펜더 프레시전으로 “김태원과 결성한 밴드 ‘부활’ 에서 연주” 했으며, 1988년 송골매 8집 타이틀곡 ‘외로운 들꽃’ 에서는 리드보컬을 맡았습니다(스포츠한국 2024). 세션 데뷔는 1989년 오아시스레코드입니다. 그 이후는 Part 3 의 몫입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윤상이 1980년대 후반 김완선의 백밴드 ‘실루엣’ 에서 베이시스트로 1년가량 활동했다고 적고 있는데, 위키 서술이라 참고로만 둡니다.

4. 크레디트가 확인된 음반 — 1970~1980년대#

연도음반베이스드럼출처
1964애드포 1집한영현권순근최규성, 한겨레 (음반에는 이름 없음)
1973이장희 『그건 너!』조원익배수연Discogs 8810022
1974신중현과 엽전들 1·2집이남이김호식 / 권용남Discogs 11232949 · 14337582
1974검은나비 『Album Vol. 1』이태현문영배Discogs 2764403
1977산울림 『새노래 모음』김창훈김창익Discogs 3568341
1978사랑과 평화 1집Sarvo (김명곤 Bass 겸)김태흥Discogs 8480322
1978송창식 『사랑이야/토함산』조원익 (석기시대), 사르보배수연최지선, 한겨레 (LP 뒷면)
1979사랑과 평화 2집송홍섭김태흥Discogs 9801016
1979송골매 1집이응수배철수Discogs 5540964
1979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이수영최세진Discogs 7945983
1982조용필 4집김택환이건태Discogs 14959701
1982송골매 2집김상복오승동Discogs 5642326
1983조동진 『Golden Album』조원익유영수Discogs 8875287
1983불나비조용남문영배Discogs 20000224
1984조용필 6집송홍섭백천남Discogs 14873596
1984노래를 찾는 사람들 1 · 따로또같이 II조원익안기승Discogs 9243035 · 11962391
1984윤수일 Band III조용식이건태Discogs 18247741
1985조용필 7집송홍섭 (편곡 겸)김정위Discogs 14959991
1985조동진 3집조원익안기승Discogs 9243803
1986들국화 2집최성원주찬권Discogs 6975761
1986어떤날 I조동익안기승Discogs 9242435
1986시인과 촌장 2집 『푸른 돛』조동익김영석Discogs 6215869
1986부활 1집김병찬황태순Discogs 8866692
1987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조원익유영수 · 안기승원판 LP 속지
1987이문세 4집이수용배수연Discogs 33154440
1989이문세 6집이수용배수연Discogs 11366503
1989김현철 1집 · 이원재 『혼자 내리는 비』조동익김희현Discogs 11145824 · 24331718
1989장필순 1집 『어느새』송홍섭 · 조동익김희현 · 배수연Discogs 11497777
1989김수철 『황천길』신현권배수연Discogs 6215995
1989신촌블루스 II이원재정태국Discogs 9242519

이 표에 없는 음반이 이 편의 한계입니다. 김현식 1~5집, 조용필 1·2·3·5·8집, 들국화 1집, 봄여름가을겨울 1·2집, 빛과 소금 1집, 한영애 2집, 변진섭·이승철·동물원의 1집에는 Discogs 에 베이스 크레디트가 없습니다. 송홍섭이 김현식 1집의 세션이었다는 OSEN 의 서술, 신현권이 1980년대 후반 “당대의 주요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 했다는 채널예스의 서술은 음반을 특정하지 못한 채로 남습니다.

마치며#

1세대의 20년을 한 줄로 줄이면 “밴드의 베이시스트가 녹음실의 베이시스트가 되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편곡자와 제작자가 된 시기” 입니다. 송홍섭은 7집의 편곡을 맡으며 위대한 탄생의 사운드 디렉터가 되었고, 조원익은 유재하의 음반을 제작했으며, 조동익은 동아기획의 편곡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바깥에서 신현권이 동두천과 변두리 클럽의 16년을 거쳐 서울스튜디오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편은 그가 삐삐 다섯 개를 차고 다니던 시절에서 시작합니다.

편주제
Part 1개관
Part 2 (이 글)1세대 — 1970~1980년대
Part 32세대 — 1990~2000년대
Part 43세대 — 2010년대 이후
Part 5유파 분석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