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Fable 5.1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2017년 봄, 김광민이 한국일보 기자에게 1980년대 초를 이렇게 돌아봤습니다.

그때는 건반 연주자가 귀했어요. 다들 밴드 음악하고 싶어해 기타연주자만 많았으니까.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걸 지인들이 아니까 건반 좀 연주해달라는 부탁이 정말 많았죠.

무역학과 학생이 조동진·양희은·김민기의 음반을 치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들어간 사정이 이 세 문장에 다 있습니다. 기타는 넘치고 건반은 귀했다는 것. 그리고 귀한 쪽에 앉은 사람에게는 연주 말고 다른 일이 따라왔다는 것. 건반 연주자는 코드를 알고 악보를 읽으니 편곡을 맡게 되고, 편곡을 하다 보면 곡을 쓰게 되고, 곡을 쓰다 보면 음반 전체를 맡게 되죠. 한국 대중음악에서 편곡자·작곡가·프로듀서로 불리는 사람의 상당수가 처음엔 녹음실 구석의 건반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드러머,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를 차례로 썼고, 건반까지 쓰면 밴드의 네 자리가 다 채워집니다. 그게 이 시리즈를 쓰는 이유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방금 적은 궁금증이에요. 키보디스트가 곧 편곡자이고 작곡가라는 말은 어디까지 사실인지, 그 자리가 1980년대 말 신디사이저와 미디가 들어온 뒤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저는 건반을 치지 않습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의 눈으로 읽었고, 다섯 편으로 나눴습니다. 이 편은 당사자들이 말한 조건과 세대 구분, 다음 세 편이 세대별 이름, 마지막 편이 계보도와 드럼·베이스·기타·건반 네 자리를 음반별로 맞춘 표입니다.

세션 키보디스트의 조건, 당사자들의 말로#

건반 연주자들의 긴 인터뷰는 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의 「가창신공」 연재에 몰려 있습니다. 박용준·장지원·고영환·강화성·송성경·이환·김광민이 다 거기서 말했어요. 읽다 보면 기타리스트들과 겹치는 말도 있고, 건반 자리에서만 나오는 말도 있습니다.

먼저 자리를 비우는 일. 박용준은 2022년에 편곡자의 덕목을 묻자 ‘프리퀀시’ 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편곡자로서 갖춰야 할 소양/덕목은 무엇보다 ‘프리퀀시(frequency)‘의 중요성을 견지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각 악기들이 자기 자리를 적절하게 차지할 수 있게끔 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뺄 땐 빼는 감각/역량도 중요해요. 국내에선 너무 꽉 채우는 걸 선호하지만 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죠.

건반은 한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화음 전체를 덮을 수 있는 악기라서, 세션에서는 치는 것보다 안 치는 게 더 어려운 모양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조미료 없는 음악을 추구하는게 제 음악 스타일” 이라고도 했고, 편곡 의뢰가 오면 가사를 외울 만큼 듣고 또 듣는다고 했어요. 음악적 아이디어는 피아노 앞에서 고민하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는데, 건반 연주자가 건반 앞을 떠나라고 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그다음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치는 일입니다. 장지원은 KBS 「불후의 명곡」 음악감독을 첫 방송부터 맡아 11년을 넘겼고, 세션으로 친 곡이 2만 곡이 넘는다고 합니다. 2022년에 세션맨과 음악감독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을 묻자 한 단어로 답했어요. “임기응변입니다. 그때그때 특정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하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소양이 아닐까 해요.”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지만 경험치도 중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융스트링 악장 김미정이 2024년에 한 말이 여기에 붙습니다. 녹음실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한 시간 안에 끝나니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동시에 악보를 읽어야 하고, 그래서 세션 연주자는 초견이 좋아야 한다고요. 김미정은 그 자리에서 최태완 이야기를 했습니다. 호텔에서 건반 없이 오선지에 4성부를 그려가며 편곡할 정도라고.

세 번째는 바꾸지 않는 용기인데요. 박진영·손태진·정동원 밴드의 밴드마스터 고영환은 2024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밴드 편곡 때 최대한 거부감을 줄이려고 합니다. 히트곡을 새롭게 편곡해 바꿨을 때 반응이 긍정과 부정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들로부터 ‘저걸 왜 바꿨지’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 「나는 가수다」 에서 김연우의 「나와 같다면」 을 무반주로 시작하게 만든 편곡자이기도 합니다. “무반주 편곡이 빠지면 이 곡은 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확신이 있었어요.” 안 바꾸는 것과 확신이 있을 때 크게 바꾸는 것이 한 사람 안에 있다는 게, 세션 건반의 일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편곡자라는 자의식. 강화성은 2021년에 “편곡자는 프로듀서의 연장입니다” 라고 했고, 편곡자는 무엇보다 악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 미디보다 기타·피아노 같은 실제 악기를 다루며 곡을 쓰는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송성경은 유희열과 작업하면서 편곡의 지루함을 특히 싫어해서 이어지는 연주 중 잠시라도 변화를 줘야 하고, 지금도 태블릿이 아닌 종이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 와서 주문한다고 전했어요. 고영환이 자기 직업을 열거한 문장을 보면 이 악기의 자리가 얼마나 넓은지 보입니다.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세션 키보디스트, 미디 프로그래머, 고교 음악선생(리라 컴퓨터고교), 대학강사(SAC, 서종예, 한양대), 방송 음악감독 등등 음악으로 해 볼 건 거의 다 해 본 것 같아요. 이제 저의 최종 목표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목표라는 말이 저는 오래 남았습니다.

건반 자리는 왜 편곡자의 자리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80년대 편곡가 명단에 있습니다. 한겨레 김학선이 2022년에 “변성룡, 이호준, 김명곤, 왕준기 등은 1980년대 한국 가요를 선도했던 편곡가들이었다” 고 썼는데, 왕준기를 빼면 모두 건반 연주자입니다. 같은 필자가 2024년 프레시안에서는 “이호준은 김명곤과 함께 1980년대를 양분해 온 편곡가” 라고 했고요. 이호준은 1973년 이장희의 동방의 빛에서 건반을 쳤고, 김명곤은 1978년 사랑과 평화 1집 크레디트에 키보드와 신디사이저 외에 색소폰·베이스·스트링까지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둘 다 연주자로 시작해 편곡가로 1980년대를 보냈죠.

주간경향이 2026년 9월에 실은 전자음악사 저자 인터뷰가 그 이유를 한 줄 더 보탭니다. 1980년대 녹음실에는 무그와 폴리무그, 펜더 로즈까지 갖춰져 있었는데 제대로 다룰 사람이 없었고, “이호준, 김명곤, 변성룡, 김광민 같은 분들은 건반을 잘 치던 연주자 중에 앞선 사운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 이라 독학하거나 자기들끼리 익혔다는 겁니다. 새 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에게 편곡이 갔고, 편곡을 맡은 사람이 음반의 소리를 결정했습니다.

그 구조는 다음 세대에서도 반복됩니다. 1989년 스무 살의 김현철이 자기 1집과 장필순 1집을 편곡했고, 1990년대의 유희열은 이승환 『Human』 과 『Cycle』 의 크레디트에 Programmed By 로 적혀 있으며, 윤상은 2001년 박효신 『Second Story』 에 Computer, Keyboards 로 올라 있습니다. 김형석은 김광석의 「너에게」 를 작업하며 처음 피아노 세션을 했다가 너무 어려워서 음악을 포기할까 고민했다고 2020년 방송에서 말했는데, 그 사람이 1990년대 발라드 작곡의 얼굴이 됐죠. 2010년대의 홍소진은 아이유 『Palette』 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이름에게」 를 편곡했고, 구름은 바이 바이 배드맨의 키보드로 시작해 백예린의 프로듀서가 됐습니다.

그러니 이 시리즈의 범위는 드럼·베이스·기타보다 넓습니다. 세션과 밴드의 건반 연주자뿐 아니라, 건반에서 시작해 편곡과 작곡으로 간 사람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건반 자리를 반쯤 대신한 미디 프로그래머까지 넣었어요. 어디까지가 세션 키보디스트인지 선을 긋기가 다른 악기보다 어려웠고, 그 어려움 자체가 이 악기의 성격이라고 봤습니다.

왜 1970년대부터인가#

베이스와 기타처럼 1970년대를 1세대의 출발점으로 잡았습니다. 이유는 같아요. 음반 뒷면에 연주자 이름이 적히기 시작하는 게 1970년대이고, Discogs 에 전사된 첫 건반 크레디트가 1974년 검은나비 1집의 김기표, 1978년 사랑과 평화 1집의 김명곤과 이근수, 1979년 이판근 퀸텟 ‘78 의 손수길입니다. 주간경향 인터뷰에 따르면 1973년 이장희 3집 「촛불을 켜세요」 에 신디사이저 선율이 깔려 있고 그걸 연주한 사람이 이호준이라고 하니, 크레디트 이전의 소리도 1973년부터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습니다.

그 앞은 두 문단으로만 짚겠습니다. 경기중 4학년 때 길옥윤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시작한 박춘석이 있고, 1964년 키보이스의 첫 독집에 키보드로 참여한 옥성빈이 있으며, 1968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용산 미8군 클럽에서 흑인 피아니스트의 재즈를 처음 듣고 청계천 레코드 가게를 뒤지기 시작한 신관웅이 있습니다.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은 1966년에 서울로 올라온 뒤 작곡가 김인배가 “천지나이트클럽의 피아니스트가 그만뒀으니 나오라” 고 해서,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라며 고사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김인배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됐다고 회고했어요. 이 사람들의 자리는 녹음실이 아니라 클럽과 방송 악단이었고, 이름은 음반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는 Part 2 첫머리에서 짧게만 다룹니다.

세 세대#

세대는 태어난 해보다 이름이 남은 자리로 나눴습니다. 앞선 세 시리즈와 같은 기준이에요.

flowchart LR
    G1["1세대 1970·80년대<br/>악단·그룹사운드에서 녹음실로<br/>이호준·김명곤·김광민·정원영"]
    G2["2세대 1990·2000년대<br/>조동익 사단·미디·방송 악단<br/>박용준·김현철·유희열·장지원"]
    G3["3세대 2010년대 이후<br/>가수 밴드·세션상·프로듀서<br/>송성경·홍소진·구름·윤석철"]
    G1 --> G2 --> G3
    style G1 fill:#FFD700,color:#000000
    style G2 fill:#87CEEB,color:#000000
    style G3 fill:#FFB6C1,color:#000000

1세대는 밴드의 건반이 녹음실의 건반이 되고, 거기서 편곡가가 된 사람들입니다. 동방의 빛과 위대한 탄생의 이호준,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 들국화의 허성욱, 그리고 대학생으로 세션을 뛰다가 버클리로 간 김광민과 정원영. 유재하가 위대한 탄생의 건반이었던 사실도 여기 들어갑니다. 1980년대 후반 송홍섭 사단의 황수권, 동아기획의 한송연, 조용필 6집과 신촌블루스의 오르간 김효국은 전기가 없고 크레디트만 남은 이름들이에요.

2세대는 1990년대 조동익 사단과 하나음악의 건반, 위대한 탄생 5·6기, 그리고 미디를 들고 온 사람들입니다. 더 클래식의 박용준, 1989년에 데뷔해 1990년대 내내 편곡자였던 김현철, 토이의 유희열, 미디 1세대로 불리는 윤상, 조용필 15집의 한정호와 최태완. 1990년대 말에 시작해 2010년대에 방송 음악감독과 밴드마스터가 된 장지원·고영환·강화성·이환도 여기 넣었습니다. 열일곱에 긱스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정재일은 그보다 앞서 1998년 「강원도의 힘」 OST 에서 건반 세션을 했으니 2세대 끝에 있고요.

3세대는 가수의 밴드와 세션상에서 왔습니다. 2005년 서울예대 전체 수석으로 들어가 열아홉에 김조한 무대에 선 송성경, 멜론뮤직어워드 세션상을 받은 2020년의 홍소진과 2021년의 구름, 아이유 『Palette』 의 「잼잼」 에서 신디사이저를 친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 송홍섭 앙상블의 원성진, 에이티즈 밴드의 윤준현, 송골매 투어의 안기호와 박만희처럼 라인업 기사에만 있는 이름도 이 세대입니다.

이름을 세대별로 늘어놓으면 이렇습니다. 생년은 기사의 나이에서 역산한 것이 많아 한 해 정도 다를 수 있고, 물음표는 못 찾은 경우예요.

세대주요 키보디스트 (생년)
1960년대 (도입)박춘석 (1930~2010), 옥성빈 (?), 심성락 (?), 신관웅 (1946 무렵), 윤효간 (?)
1세대김용년 (1944~2026), 이호준 (1950~2012), 김명곤 (1952 또는 1953~2001), 이근수 (?), 김기표 (?), 손수길 (?), 김청산 (?), 변성룡 (?), 유상윤 (?), 김효국 (1956 무렵), 김광민 (1960), 정원영 (1960), 박성식 (1961), 유재하 (1962~1987), 허성욱 (1962~1997), 황수권 (?), 한송연 (?), 김동성 (?), 이관형 (?), 송태호 (?)
2세대김형석 (1966), 윤상 (1968), 김현철 (1969), 박용준 (1969), 유희열 (1971), 김동률 (1974), 고영환 (1976), 장지원 (1977), 강화성 (1978), 이환 (1980), 정재일 (1982), 한정호 (?), 최태완 (?), 이종욱 (?), 나원주 (?), 길은경 (?), 안준영 (?), 민경인 (?), 김우진 (?)
3세대윤석철 (1985), 송성경 (1986), 구름 (1991 무렵), 홍소진 (?), 원성진 (?), 윤준현 (?), 안기호 (?), 박만희 (?), 김다함 (?), 박지운 (?), 이화 (?), 최병준 (?), 박민우 (?), 이의광 (?), 전진희 (?)

겹침이 있습니다. 김광민은 1세대의 세션으로 시작했지만 1998년 동덕여대에 국내 첫 4년제 실용음악과를 열어 3세대를 가르쳤고 2025년에 정년을 맞았으니 세 편에 다 나오고요. 박용준은 1990년대의 이름으로 2021년 12월부터 임영웅 밴드의 밴드마스터라서 Part 3 과 Part 4 에 같이 나옵니다. 김동률과 유희열은 세션 키보디스트라기보다 피아노 치는 싱어송라이터와 프로그래머에 가깝지만, 건반에서 출발한 작곡가를 넣기로 했으니 명단에 있습니다. 반대로 정지찬·권태은·임현기 같은 방송 음악감독은 건반 연주자라는 근거를 못 찾아 넣지 않았어요. 자화상에서 건반은 나원주였습니다.

김광민과 박용준이라는 기준점#

두 사람을 미리 말해 두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1980~90년대 한국 세션 건반의 얼굴은 김광민과 박용준입니다. 자료를 다 읽고 나서도 그 생각이 바뀌지 않았어요.

김광민 쪽 근거는 크레디트와 다음 세대가 남긴 말이에요. Discogs 로 확인한 1980년대 중반 건반 크레디트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이 김광민이에요. 1983년 조동진 『Golden Album』,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과 따로또같이 II 의 Poly Moog, 1985년 조용필 7집과 조동진 3집, 1986년 한영애 1집. 그러고 1986년에 버클리로 갔고 1989년 졸업식 사진에 한상원과 같이 서 있습니다. 조용필이 음악을 반대하는 김광민의 아버지를 설득하러 집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2020년 뉴시스 기사에 있고, 2024년 고영환은 오래전 김광민의 「모닝」 을 듣고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라고 감탄했으며 서울예대에 간 이유 중 하나가 김광민이 교수로 있어서였다고 했습니다. 박용준에게 동덕여대 강의를 제안한 사람도 김광민이었고요.

박용준 쪽은 1990년대의 녹음실입니다. 프레시안이 조동익 곁에 있던 사람으로 든 이름이 “함춘호(기타), 손진태(기타), 박용준(건반), 김현철(건반), 김영석(드럼)” 이고, 1996년 이소라 2집 1번과 7번 트랙의 피아노와 로즈, 1997년 토이 『Present』 6번과 7번 트랙의 건반이 박용준입니다. 1991년 한동준 음반을 준비하던 때 이수만의 소개로 만난 김광진은 그를 “미디, 신디사이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 로 기억했고, 더 클래식 1집이 1994년에 130만 장을 팔았는데도 “살인적인 세션 스케줄 때문에 쪽잠 자며 녹음실을 전전하는 생활이 달라지진 않았다” 고 2024년에 본인이 말했습니다. 이승환 밴드에서 6년을 쳤고, 2021년 12월부터는 임영웅 밴드의 밴드마스터예요. 1980년대 말의 미디와 2020년대의 20인조 밴드를 한 사람이 지나왔습니다.

요즘 눈여겨보는 사람은 둘입니다. 정재일과 윤석철. 정재일은 「기생충」 과 「오징어 게임」 의 음악감독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2023년 기자회견에서 “음악을 사랑했으나 시작은 노동이었다” 고 했고, 그 노동이 중학생 때 시작한 베이스와 건반 세션이었습니다. 윤석철은 재즈 트리오를 하다가 2019년 안테나에 들어가 아이유·자이언티·백예린의 음반에 건반을 쳤죠. 두 사람 다 Part 4 에서 따로 적습니다.

자료에 대해#

기댄 자료는 Discogs 에 전사된 음반 크레디트, 당사자와 동료의 인터뷰, 실명 비평입니다. 음원을 듣고 연주를 분석하지는 않았고, 크레디트가 없는 음반의 건반 연주자를 추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건반은 다른 악기보다 크레디트가 더 부실해요. 토이·전람회·윤상·김동률의 1990년대 음반은 Discogs 에 연주자가 없고, 조용필 8·9집과 김현식 전집도 마찬가지라 정원영의 위대한 탄생 시절은 본인과 송홍섭의 말에 기댔습니다. 김명곤의 사망일과 윤석철의 경력은 한국어 위키백과에 기댄 부분이 많고, 이호준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작곡 표기는 2012년 부고와 2026년 손무현 본인의 진술이 어긋나서 그대로 적었습니다. 1990년대에 미디가 세션을 대체했다는 당대 기사는 찾지 못해 그 이야기는 2010년대 이후의 회고로 씁니다. 1인칭으로 쓴 의견은 제 것이고, 그 밖의 1인칭은 자료를 읽은 사람의 반응까지입니다.

편주제
Part 1 (이 글)조건과 세 세대
Part 21970년대와 80년대
Part 31990년대와 2000년대
Part 42010년대 이후
Part 5계보도와 네 자리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