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Fable 5.1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한국 전자음악사를 쓰고 있는 사람이 2026년 9월 주간경향 인터뷰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말했습니다. 이호준과 김명곤. 한국 신디사이저의 거목인데 두 분 다 돌아가셨고, 그때 기록은 빨리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고요. 이 편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이호준은 2012년에, 김명곤은 2001년에, 허성욱은 1997년에, 유재하는 198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사자의 말이 남은 사람은 김광민·정원영·박성식·손무현 정도이고, 나머지는 동료의 회고와 음반 뒷면의 이름으로 적어야 했어요. 그래서 이 편은 다른 편보다 크레디트 이야기가 많습니다.

1960년대, 클럽과 악단의 피아노#

음반에 이름이 남기 전의 건반은 클럽 무대와 방송 악단에 있었습니다. 박춘석은 경기중 4학년 때 길옥윤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시작했고, 전쟁 뒤에는 은성경음악단을 꾸려 KBS 라디오 생방송 연주를 맡았죠. 그 박춘석악단에서 13년을 친 윤효간은 2011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세션에 참여한 곡이 1000곡이 넘는다고 했는데, 서른 살에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고 유학파들을 제치고 뽑혔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이태원 크라운호텔 나이트클럽 대기실에서 2년간 숙식하며 밴드의 키보드를 쳤다고요.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은 1966년 서울로 올라와 장충동과 마장동 녹음실을 오가다가, 작곡가 김인배가 천지나이트클럽의 피아니스트가 그만뒀으니 나오라고 해서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라며 고사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김인배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앉혀야 했던 시절이에요.

그룹사운드 쪽에는 1964년 키보이스의 첫 독집 『그녀 입술은 달콤해』 에 키보드로 참여한 옥성빈이 있고, 히식스의 유상윤과 이영덕이 있습니다. 재즈 쪽은 1968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용산 미8군 클럽에서 흑인 피아니스트의 재즈를 처음 듣고 청계천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찾아 야전 전축에 올려 놓고 수없이 듣고 흉내 낸 신관웅이 있죠. 가르쳐 줄 선생도 교재도 없었다는 그의 말이 이 시대 건반 연주자들의 공통 사정이었을 겁니다. 이 사람들 중 유상윤은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들어가면서 다음 세대와 이어집니다.

이호준, 1973년의 신디사이저#

이장희가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1973년의 밴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저랑 음악을 같이 한 밴드 멤버가 기타 강근식 하고 건반 이호준, 베이스 조원익, 드럼 배수연으로 나중 세션과 연주의 레전드가 된 인물들입니다.” 편곡 개념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강근식이 기타를 치고 조원익이 가세하고 건반이 보태지면서 곡이 생겼다고, 편곡이 아닌 잼으로 음악을 완성했다고요. 동방의 빛입니다. 전자음악사 저자에 따르면 같은 해 이장희 3집의 「촛불을 켜세요」 에 기타나 피아노가 아니라 신디사이저가 연주하는 선율이 깔려 있고,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사운드트랙과 송창식의 「새들」 에도 같은 소리가 쓰였으며, 셋의 공통점이 이호준이라고 합니다. 아주 드물게 신디사이저를 먼저 연주한 사람이었다는 거죠. 1978년 송창식의 「사랑이야/토함산」 뒷면에는 김석규·조원익·이호준·배수연의 석기시대가 연주자로 적혀 있고, 1982년부터 1985년까지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건반이었습니다. 1984년 조용필 6집의 Keyboards 가 이호준이고, 송홍섭은 그 시절의 밴드를 “이호준(키보드), 유상윤(키보드), 백천남(드럼)” 으로 기억했어요.

그런데 이호준은 연주자보다 편곡가로 1980년대를 보냈습니다. 김학선이 2024년 프레시안에 쓴 글이 그 자리를 제일 잘 설명합니다. “이호준은 김명곤과 함께 1980년대를 양분해 온 편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조용필의 「친구여」 와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박미경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를 작곡했고 당연히 편곡하고 연주했는데, 그래도 그에게는 작곡가보다 편곡가와 건반 연주자, 위대한 탄생의 밴드 마스터라는 이미지가 더 짙다는 겁니다. Discogs 에서 확인되는 편곡 크레디트는 1987년 최성수 『동행』, 같은 해 구창모 『感』 의 두 곡, 1989년 양수경 2집이고, 당시 잘 나가던 연주자들은 거의 반년 치 일정이 미리 짜여 있었다고 같은 글이 전합니다. 이 글에 김광민의 증언이 한 줄 들어 있는데, 저는 그 줄에서 오래 멈췄어요. 이호준에게 많은 걸 배운 김광민에 따르면 그 역시 허비 핸콕 같은 재즈를 기막히게 구사할 줄 알았지만, 팔리는 음악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2012년 4월 27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62세. 그날 함춘호가 트위터에 “‘위대한 탄생’ 초기 멤버이며 조용필님의 ‘친구여’ 작곡자이신 이호준 선배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올렸고, 2014년에는 헌정 음반이 나와 수익금이 고향 화성의 노래비에 쓰였습니다. 부고 기사들은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도 이호준 작곡으로 적었는데, 2026년 YTN 에서 손무현이 그 곡을 자신이 작곡하고 편곡하고 직접 프로그래밍했다고 말했으니 그 부분은 부고의 오기로 보입니다.

김명곤, 사랑과 평화의 건반#

최이철이 2012년 채널예스에서 김명곤을 처음 만난 날을 이야기했습니다. 1974년쯤 대구, 옆방에 살던 명곤이가 소주를 네다섯 병 혼자 마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연주를 보니 정말 잘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전주MBC 악단장이었고 동갑이라 친해졌고, 코드워크에 밝은 친구라 그룹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고. 최이철이 자기 방에서 헤드폰으로 버디 마일스를 들려준 뒤 뭉쳤고, 김태욱·김명곤·최이철·김태흥의 4인조로 미8군에서 시작했다는 게 1972년이라고 했으니 연도가 조금 어긋나지만 그대로 옮깁니다. 1976년 서울나그네를 거쳐 1978년 10월 28일 사랑과 평화 1집이 나왔는데, 서울나그네 때는 건반이 김명곤 혼자였고 사랑과 평화에서 이근수가 한 명 더 들어왔다고 했어요.

연주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김명곤이 그 때 건반을 치는 것을 보면 무슨 벌레가 연주하는 거 같아. ‘따라라라라라라’ 하면서.” 아코디언도 잘했고 예스의 「Long Distance Runaround」 를 연주하면 정말 죽였다고. 그리고 고마운 게 조용한 곡을 할 때 실력이 나온다는 거였다고요. 스탠더드 재즈 같은 것. 1집 크레디트에는 김명곤이 보컬·알토 색소폰·키보드·베이스·스트링·신디사이저로, 이근수가 키보드·오르간으로 올라 있습니다.

1980년대의 김명곤은 편곡가였습니다. 한겨레 최지선은 2006년에 “‘한국의 신쓰 팝’이라 할 나미의 ‘빙글빙글’ 등의 작곡을 비롯해 1980년대 많은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자로서” 활약했다고 썼고, 김학선은 “나미의 ‘빙글빙글’부터 이문세의 명작들로 이어지는 80/90 시대 일련의 작품은 감탄스럽다… 이문세에게는 김명곤이 있었다” 고 했어요. 크레디트로는 1984년 윤수일 밴드 III 의 편곡, 1986년 한영애 1집의 피아노와 신디사이저(김광민과 같이), 1987년 이문세 4집의 피아노와 A면 전곡 편곡, 1989년 이문세 6집의 피아노·신디사이저·편곡이 확인됩니다. 2001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국어 위키백과에 적혀 있는데 부고 기사는 찾지 못했습니다.

변성룡은 그 옆에 있습니다. 한겨레 2006년 기사에 박건호의 증언으로 이범희가 “김광석(기타), 변성룡(건반), 배수연(드럼) 등 신진 연주자들을 과감하게 녹음에 기용했다” 는 대목이 있고, 2022년 김학선은 해바라기의 음반을 두고 크레디트에 표기되진 않았지만 편곡은 건반을 맡은 변성룡이 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확인되는 크레디트는 1988년 변진섭 1집의 편곡(최경식·하광훈과 함께)과 1989년 김수철 『황천길』 의 신디사이저예요. 위대한 탄생 2기의 건반이기도 했습니다. 1944년생 김용년은 1972년 라틴 그룹 조커스와 1970년대 오치수 악단의 건반이었다가 1980년대에 편곡가가 됐다고 위키백과에 있는데, 크레디트로 남은 건 1987년 이문세 4집의 “Synth [Moog], Synth [DX7]: 김용년” 입니다. 1980년대 편곡가 명단에서 왕준기를 뺀 전원이 건반 연주자였다는 건 Part 1 에 적었습니다.

위대한 탄생의 건반 의자#

조용필의 밴드는 건반 자리가 두 개였고, 그 자리를 거쳐 간 사람의 명단이 1980년대 건반 계보의 절반입니다. 1982년 4집의 크레디트는 “Organ, Keyboards: 김청산” 이고, 베이스 김택환·드럼 이건태·기타 곽경욱이 같이 있습니다. 2기는 송홍섭이 말한 대로 이호준과 유상윤이었고 변성룡도 있었어요. 1984년 6집은 이호준의 키보드에 김효국의 오르간이 붙었고, 1985년 7집은 “Keyboards, Synth: 김광민” 입니다. 편곡은 조용필·송홍섭·이범희, 베이스 송홍섭, 드럼 김정위, 기타 최진영.

그 사이에 유재하가 있습니다. 송홍섭이 2017년 OSEN 에서 자신의 공로로 꼽은 게 “당시 한양대생이었던 유재하를 건반주자로 발탁, 유재하가 작곡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 7집에 수록케 한” 일이에요. 전태관은 대학 때 정원영의 소개로 유재하를 만났는데 건반 연주자라며 나타났다고 회고했고, 1986년 김현식 3집 밴드의 초기 멤버는 김종진·장기호·전태관·유재하였습니다. 동아기획 김영은 2005년에 유재하를 김현식 3집의 세션 멤버로 데리고 있었는데 집이 유복한 탓에 자비를 털어 독집을 녹음했다고 말했죠. 유재하가 독집을 위해 나가면서 박성식이 들어왔습니다. 박성식은 서울신학대 교회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2022년 인터뷰에서 1970년대에는 대중음악보다 교회 성가 수준이 굉장히 높아서 고등학교 때까지 거기서 음악 공부를 했다고 했어요. 장기호는 그 시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관(봄여름가을겨울)이랑 재하(유재하)가 또 친구였고, 김광민, 한상원… 마이클 프랭크스 같은 음악을 들으며 ‘동아리’처럼 만나 음악하던 그 시절”. 1987년 유재하 1집의 크레디트는 “Piano, Synthesizer : 유재하” 입니다. 위대한 탄생의 건반 의자는 1990년대에 한정호와 최태완에게 가는데 그 이야기는 Part 3 에 있습니다.

기자촌 교실과 석기시대, 김광민과 정원영#

1977년 이판근이 은평구 기자촌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래층에서는 부인이 문방구를 했고 위층은 살림집이자 재즈학교였다고 2024년 경향신문이 썼어요. 거기서 배운 사람으로 정원영·봄여름가을겨울·이정식·김광민·윤희정이 꼽힙니다. 같은 무렵 송홍섭이 고등학생이던 한상원과 정원영을 꼬셔서 밴드를 만들었는데 그게 석기시대이고, 셋이 다 웨더 리포트 광팬이라 허비 행콕을 많이 연주했다고 본인이 말했습니다. 정원영은 고3 때 이장희의 눈에 띄었고, 석기시대·사랑과 평화·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디스트로 참여한 뒤 버클리로 갔습니다. 2020년 뉴시스에서 그가 잊지 못한다고 한 말이 송홍섭의 것이었어요. “(베이시스트) 송홍섭 선생님이 ‘네 음악을 최고라고 생각한다’면서 동등하게 대해 주셨던 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열아홉, 스물에 만난 선배들이 자신을 동료처럼 대해 줬고, 그래서 자기도 젊은 친구들을 어른으로 대하게 됐다고요.

김광민은 명지대 무역학과를 다니면서 1980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동서남북과 1981년 대학가요제 동상의 시나브로에서 건반을 쳤습니다. 동서남북의 「나비」 에 들어간 신디사이저가 중요하다고 본 전자음악사 저자가 본인에게 물었더니 “내가 동서남북에서 신시사이저를 썼나” 하며 계속 헷갈려 하다가 들려주니 마지막에야 “내가 이렇게 했구나” 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시나브로의 「을지문덕」 신디사이저 솔로는 뭘 모르고 한 연주라 자랑스럽지 않다고 했답니다. 그 뒤가 Part 1 에 인용한 “그때는 건반 연주자가 귀했어요” 의 시절입니다. 1983년 조동진 『Golden Album』 의 키보드,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의 피아노와 기타·만돌린, 따로또같이 II 의 일렉트릭 피아노와 Poly Moog(피아노는 허성욱), 1985년 조용필 7집, 조동진 3집(이호준과 같이 피아노·신디사이저), 1986년 한영애 1집. 1986년에 버클리로 갔고, 그 전에 유재하를 서울음반에 소개한 사람이 김광민이었습니다. 1989년 버클리 졸업식 사진에 한상원과 같이 서 있고, 1990년에 낸 1집의 「지구에서 온 편지」 는 유재하에게 바친 곡이에요.

동아기획과 송홍섭 사단의 건반#

1980년대 후반 녹음실의 건반은 크레디트로만 남은 이름이 많습니다. 허성욱은 그중 말이 좀 남은 편이에요. 1983년 10월 전인권·허성욱·최성원이 모여 들국화를 만들었고, 밴드 이름이 허성욱이 씹고 있던 껌 이름이었다는 이야기가 위키백과에 있습니다. 1986년 2집의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1984년 따로또같이 II 의 피아노, 1989년 이원재 『혼자 내리는 비』 의 피아노·일렉트릭 피아노·신디사이저(김현철과 같이)가 크레디트이고, 2026년 오마이뉴스는 최성원 기사에서 “클래시컬하고 프로그레시브한 건반으로 사운드의 격을 높인 허성욱” 이라고 썼습니다.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전인권은 2019년 대전 공연을 앞두고 “마침 성욱이랑 둘이 만들었던 앨범이 『추억 들국화』 예요” 라며 그 공연을 허성욱에게 바친다고 했어요. 2025년 9월 들국화 40주년 공연에서 전인권이 칠판에 먼저 적은 이름이 허성욱·주찬권·조덕환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짧게 적습니다. 한송연은 1986년 시인과 촌장 『푸른 돛』 의 키보드이고, 베이스 조동익·드럼 김영석·기타 이병우와 함춘호가 그 음반에 같이 있습니다. 2016년 국민일보가 “함춘호의 담담한 기타와 한송연의 다채로운 건반 연주” 라고 썼어요. 황수권은 송홍섭 쪽입니다. 프레시안이 1980년대 후반 송홍섭이 편곡을 맡은 작품에는 기타 박청귀·이병우, 키보드는 주로 황수권, 드럼은 김희현이나 배수연이었다고 했고, 1989년 장필순 1집에 김현철과 나란히 키보드·피아노로 올라 있으며 한영애 『바라본다』 의 세션으로도 꼽힙니다. 김효국은 1984년 조용필 6집과 1989년 신촌블루스 II 의 오르간, 어떤날 II 의 신디사이저이고, 2011년 연합뉴스가 “30년 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해 온 세션으로 소개한 사람이에요. 김동성은 조동진 『Golden Album』 의 피아노와 1988년 신촌블루스 1집, 이관형은 1986년 어떤날 I 의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송태호는 같은 해 부활 1집과 1989년 이문세 6집·김수철 『황천길』 의 신디사이저, 손수길은 1979년 이판근 퀸텟 ‘78 의 피아노입니다.

음반연도건반편곡
사랑과 평화 11978김명곤·이근수
조용필 41982김청산
조동진 『Golden Album』1983김광민·김동성
따로또같이 II1984김광민·허성욱
조용필 61984이호준·김효국
조용필 71985김광민조용필·송홍섭·이범희
조동진 31985김광민·이호준
들국화 21986허성욱
시인과 촌장 『푸른 돛』1986한송연
한영애 11986김명곤·김광민
이문세 41987김명곤 (피아노)·김용년 (Moog·DX7)김명곤
변진섭 11988변성룡·최경식·하광훈
김현철 11989김현철김현철
장필순 11989김현철·황수권김현철·손진태·송홍섭
이원재 『혼자 내리는 비』1989김현철·허성욱·진형주이원재·조동익·함춘호
이문세 61989김명곤·송태호김명곤
김수철 『황천길』1989변성룡·송태호·김동성김수철

1989년, 스무 살의 김현철#

이 세대의 끝에 김현철이 있습니다. 1969년생이 1989년에 낸 1집의 크레디트가 “Arranged By, Producer: 김현철 / Piano, Synthesizer: 김현철” 이고, 베이스 조동익·드럼 김희현·기타 손진태와 함춘호, 제작 김영이에요. 같은 해 장필순 1집에서 열 곡 중 네 곡을 편곡했고(나머지는 손진태와 송홍섭), 황수권과 키보드를 나눠 쳤으며, 이원재의 음반에서는 허성욱과 건반을 나눴고, 어떤날 II 에도 신디사이저로 들어가 있습니다. 1980년대 편곡가들이 밴드와 악단을 거쳐 녹음실로 온 사람들이라면, 김현철은 처음부터 녹음실에서 편곡자로 시작한 첫 세대예요. 프레시안은 1990년대 조동익 곁의 건반으로 박용준과 김현철을 나란히 꼽았고,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있습니다.

녹음실에 컴퓨터가 들어온 해#

1980년대 녹음실에는 신디사이저가 이미 있었습니다. 전자음악사 저자에 따르면 녹음실은 밴드가 쓰도록 장비를 갖춰 놔야 하니 무그와 폴리무그, 값이 비쌌던 전기 피아노 펜더 로즈까지 두고 있었고, 다만 제대로 다룰 사람이 없어 널리 쓰이지 못했다고 해요. 오버하임은 한국에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조용필이 미국에 갔다 오면서 사왔다는 이야기를 김광민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윤상은 중학생이던 1981년 낙원상가 쇼룸에서 롤랜드 주피터-8 의 가격표를 80만 원으로 읽고 대학 등록금보다 비싸다고 놀랐는데 다시 보니 800만 원이었다고 했고, 처음 산 신디사이저는 1987년 50만 원을 준 카시오 CZ-5000 중고품이었습니다.

크레디트에서 그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는 게 1984년 따로또같이 II 의 Poly Moog 이고, 1986년 어떤날 I 에는 “Drum Programming: 조동진” 이, 1987년 이문세 4집에는 김용년의 Moog 와 DX7 이, 1989년 어떤날 II 에는 조동익의 Computer Program 과 김영석의 Digital Drum Program 이 적혀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2019년에 신중현이 제작한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 (1987) 을 “한국 최초의 컴퓨터 댄스 음악” 이라고 썼는데, 손무현이 2026년 YTN 에서 그 장면을 말했어요. 신대철의 집에 놀러 갔더니 기타로 끝장을 본 신중현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그때 만들던 노래가 그 곡이었다고요. 손무현 본인의 말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 음악 그래서 ‘미디’라는 단어가 뮤지션 업계에서 강타할 때예요. 컴퓨터로 음악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시기가 곧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딱 그 시점이었어요.

1989년과 1990년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는 사람이 연주하는 게 거의 없고 자기가 직접 프로그래밍하고 기타만 좀 쳤다고 했고, 장기호는 1990년 빛과 소금 1집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붙잡고 3개월 매달려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건반 연주자가 귀하던 시절이 끝나는 자리에 컴퓨터가 서 있었던 셈인데, 손무현은 컴퓨터를 한다고 라이브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두 개를 적절히 섞는 거라고 했어요. 1990년대에 그 둘이 어떻게 섞였는지가 Part 3 의 한 축입니다.

자료에 대해#

이 편은 Discogs 크레디트와 동료의 회고에 많이 기댔습니다. 이호준의 1979년 위대한 탄생 데뷔라는 아시아경제 서술은 1973년 동방의 빛과 어긋나 쓰지 않았고, 향년도 62세(중앙·경향)와 61세(뉴스엔)가 갈려 중앙일보를 따랐습니다. 김명곤의 생년은 위키백과의 1952년과 최이철의 “동갑(1953년생)” 이 다르고, 사망일은 위키백과에만 있어요. 유재하의 위대한 탄생 합류 연도는 같은 위키 문서 안에서도 1982년과 1984년이 섞여 있어 연도를 적지 않았습니다. 황수권·한송연·김청산·김효국은 전기 자료가 없어 크레디트와 기사 한 줄로만 적었고, 김용년의 1970년대 경력과 허성욱의 학력은 위키백과 단독입니다. 조용필 8·9집과 김현식 전집, 유재하 1집 재발매에는 Discogs 크레디트가 없어 그 음반의 건반은 당사자 말로만 다뤘습니다.

편주제
Part 1조건과 세 세대
Part 2 (이 글)1970년대와 80년대
Part 31990년대와 2000년대
Part 42010년대 이후
Part 5계보도와 네 자리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