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Fable 5.1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2022년 가을 산울림 1집을 리마스터하면서 김창완이 1977년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최고로 꼽히던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판만 나오면 소리가 왜 그렇게 쪼그라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리마스터를 제안한 김경진은 한국에서는 마스터 릴 테이프가 남아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했어요. 일단 앨범을 만들고 나면 테이프를 재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고요. 1970년대와 80년대의 소리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편에 나오는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음반 뒷면의 한 줄이나 다른 사람의 회고로만 남아 있어요. 말이 남은 사람은 최세영과 이태경, 그리고 1970년대 말에 시작한 임창덕 정도입니다.

1946년 마장동에서 1969년 장충동까지#

이름이 남은 첫 녹음실은 마장동에 있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음악 활동을 하던 최성두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고려레코드의 첫 광고를 냈고, 1947년 8월 「애국가」 를 첫 음반으로 냈으며, 전쟁 전까지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가요를 만들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이준희가 2021년에 국산 음반의 효시라고 쓴 회사예요. 1954년 9월부터는 같은 마장동 366번지에서 영창산업의 유니버살레코드가 음반을 냈는데, 초창기 녹음 설비가 부족해서 첫 작품들은 마장동이 아니라 중앙청 공보처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마장동 공장에서는 음반만 찍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가 1960년대 중반 녹음기사 이청과 동업자의 스튜디오가 됐어요. 서울역사박물관의 2013년 마장동 조사에 실린 이청의 말이 이렇습니다.

스튜디오가 왜 마장동에 자리 잡게 됐냐면 (중략) 나와 함께 공장으로 허가를 받은 동업자 분이 이곳에 있던 영창피아노 직원이었어요. 원래 이곳이 1950년대쯤 영창피아노 공장이 있던 곳이에요. 영창피아노 회사가 이사를 가면서 나랑 동업하던 분이 그 공장 건물을 인수하면서 스튜디오도 여기서 함께 마장동에 자리 잡게 된 겁니다.

그 기사는 이청을 “당대 최고의 녹음기사” 라고 불렀고, 2019년 서울신문은 “대표적인 1세대 엔지니어 이청씨” 라고 썼습니다. 유니버샬 레코딩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1968년에 문을 열었다는 게 서울신문과 마장뮤직의 설명이고, 신중현과 양희은의 포크 음반이 거기서 녹음됐다고요. 1978년 송골매의 데뷔곡도 마장동이었는데, 배철수는 2020년에 “마장동의 한 녹음실에서 했었는데 연습 연주로 녹음을 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고 했어요. 2010년 마장뮤직이 그 건물을 인수해 LP 공장을 다시 세울 때 이청과 이태경이 자문과 기술 전수를 했습니다.

장충동 녹음실은 사장 이름이 한 번 나옵니다. 서유석이 2026년 국민일보에 쓴 데뷔 회고에 “최성락 장충동 녹음실 사장과 기획실 관계자들이 내 노래를 음반 첫 곡에 올리고 표지 전면에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라는 대목이 있어요. 1969년입니다.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은 1966년 서울로 올라와 장충동과 마장동 녹음실을 오갔는데 장충동이 당시 시설 면에서 최고의 녹음실이었다고 회고했고, 1968년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 사환으로 심부름을 하러 장충동 녹음실에 갔다가 그날 가수가 나타나지 않아 심심풀이로 마이크 앞에 섰다는 게 경향신문의 서술입니다. 정작 본인은 2018년 한겨레 인터뷰에서 마장동 녹음실에서 녹음했다고 했고, 기사가 그 차이를 적어 뒀어요. 그때의 녹음을 나훈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연습 한 번 하고 녹음하면서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버렸어요.

한 곡 녹음해 판을 내는 데 6만 원을 내야 했던 시절이라고요. 그 앞에 1964년이 있습니다. 에드포의 첫 음반은 장충녹음실의 응접실에서 녹음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드러머 권순근이 2018년 최규성에게 “장충동이 아닌 동대문에서 녹음했다” 고 증언했어요. 카펫이 깔린 가정집 응접실에서 휴대용 미군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마이크 한 개를 길게 연결하고 멤버들이 둘러서서 동시녹음을 했고,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조건에서 14곡을 아침부터 실수 없이 한 번에 끝냈다고 합니다. 그 녹음기 앞에 누가 앉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1950~60년대 미8군 클럽과 방송국의 기술자 이름도 찾지 못했어요. 1970년 이전의 엔지니어는 이청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녹음실의 이름입니다.

세 녹음실의 시대#

서울 녹음실 리코딩 악단의 악단장이었던 송순기가 2016년 문화일보에 1970~80년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동부 이촌동에 있던 서울 스튜디오와 장충동 스튜디오가 양대 산맥이었지요. 이와 함께 마장동 스튜디오가 3대 녹음실이었어요.” 가수들이 몇 번이나 녹음하고 목소리를 기계로 보정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녹음실에서 한 번에 딱 맞춰야 했고, 제작자가 3시간 30분 안에 몇 곡을 부탁하면 리허설 한 번, 악보 체크, 가수와 한두 번 맞춘 뒤 시간 안에 끝내야 했다고요. 그때 가수들의 라이브 실력이 좋은 것도 이런 제작 환경 때문이었다는 게 세션 연주자의 말이에요.

그 세 곳 가운데 이름이 제일 많이 남은 곳이 서울스튜디오입니다. Discogs 의 1977년 이정선 3집과 1979년 4집 노트에 “녹음: 서울스튜디오” 가 있고, 1974년 검은나비 1집은 장충스튜디오, 1983년 김수철 1집도 장충스튜디오예요. 동아기획의 김영이 2005년 세계일보에 한 말이 1970년대 말 그 녹음실의 형편을 보여 줍니다. 미국 음반은 8채널이나 16채널로 녹음하는데 우리는 2채널이라 소리가 찌그러지는 걸 알고 서울스튜디오 사장을 찾아갔더니, 한국에는 아직 16채널 녹음 장비와 그를 다룰 엔지니어가 없으니 80년대나 되면 들어올 거라고 했다는 겁니다.

서울스튜디오의 최세영#

2021년 SBS 「아카이브 K」 는 동아기획의 소리를 서울스튜디오로 설명했습니다. 김영이 소속사의 모든 앨범을 동부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그 스튜디오는 다른 곳보다 시설이 앞서고 요금도 훨씬 비쌌으며, 사장인 최세영은 전설적인 녹음 엔지니어로 동아기획의 앨범 녹음을 주도했다고요. 2채널 녹음이 기본이던 시대에 24채널 녹음 방식을 고수했고, 녹음 후 바로 믹싱을 거쳐 자체 LP 판까지 제작해 청음회로 소리를 점검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최세영 본인의 말은 두 줄이에요. “엔지니어로서 당연한 것이다. 이미 다른 해외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뉴스엔이 옮긴 이 말.

사운드 좋게 하는데 미쳐있었다. 당시에는 저희가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16채널 멀티트랙 녹음의 의미는 소리를 16개 테이프에 악기별로 따로 녹음을 한다는 뜻이다. 전에는 2채널로 녹음했다. 24채널 녹음은 저희가 최초였다

채널 수에 대한 증언은 서로 어긋납니다. 김영은 2005년에 최초로 16채널 녹음이 도입된 것은 1985년 9월에 나온 들국화 1집이라고 했고, 녹음 부스에서 악기 위치를 바꿔 드럼을 맨 앞자리에 놓고 보컬을 악기 부스에 넣었더니 사운드가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고 했어요. 최성원은 2003년 인터뷰에서 같은 음반을 24트랙으로 녹음했다고 했고, 최세영은 24채널이 자신들이 최초라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저는 모르겠고, 셋을 그대로 둡니다. 같은 음반을 두고 2026년 오마이뉴스가 최성원의 글을 인용했는데, 빈티지 펜더 베이스의 출력에 기계의 게이지가 터질 듯이 올라가는데도 최세영은 그 연주를 깎아내지 않고 “녹음 게이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네. 녹음하기 아주 좋아!” 라며 그대로 테이프에 담았다는 이야기예요. 그 기사는 녹음실을 ‘오리엔트 사운드’ 라고 적었는데 다른 자료는 모두 서울스튜디오라 그대로 두고 밝힙니다.

최세영은 197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2016년 뉴시스가 썼고, 신중현과 트윈폴리오·산울림·윤수일·들국화·이문세·유재하 유작·김현식·조용필·신해철의 음반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크레디트로 확인되는 건 1986년 한영애 1집의 노트 “Recording: 서울스튜디오/최세영”, 1989년 이문세 6집의 녹음과 믹싱, 같은 해 장필순 1집(1989년 10월 31일 서울스투디오)의 녹음과 믹싱이에요. 198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유재하 1집은 엔지니어 이름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음반의 2001년 리이슈 크레디트에 Recorded By 최세영이 있어 거기에 기대는 정도예요. 2019년 대중문화예술 제작스태프 대상에서 문체부장관 표창을 받았을 때 연합뉴스가 그를 “한국 최초의 레코딩(녹음) 스튜디오인 서울스튜디오를 이끈 1세대 레코딩 엔지니어” 라고 불렀습니다.

서울스튜디오에는 최세영 옆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1989년 김현철 1집의 Recorded/Mixed By 는 송형헌이고 어시스턴트가 노양수예요. 장필순 1집은 송형헌과 최세영이 같이 녹음하고 믹싱했고, 이문세 6집에는 최세영·도정희와 함께 ‘송형현’ 이 있으며, 1986년 부활 1집의 Mixed At Seoul Studio 크레디트에는 ‘Song Yeong Hun’ 이 있습니다. 표기가 셋이라 같은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어요. 1984년 따로또같이 II 의 최영철도 서울스튜디오입니다. 그리고 서울스튜디오는 연주자도 뒀습니다. 베이시스트 신현권이 1980년대에 서울스튜디오 소속 연주자로 발탁돼 당대의 주요 음반에 참여했다는 게 베이시스트 시리즈에 적은 이야기이고, 송순기의 악단 이름이 ‘서울 녹음실 리코딩 악단’ 이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지구레코드의 이태경#

1982년 3월 이용의 「잊혀진 계절」 이 나오기 전,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의 지시로 가사를 ‘시월의 마지막 밤’ 으로 바꿔 다시 녹음하고 여성 코러스의 허밍만 덧녹음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일간스포츠 석광인이 2024년에 쓴 비화인데,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는데도 “당시 지구레코드 스튜디오의 엔지니어였던 이태경 감독은 이미 녹음된 피아노 독주의 미세한 사운드까지 살리느라 심혈을 기울였다” 고 해요. 그 노래가 연말 가요상에서 조용필을 밀어내고 대상을 받았고, 가요에서도 피아노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은 지구레코드는 스튜디오 피아노를 세 배 비싼 스타인웨이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태경은 Discogs 에 사람 이름으로 또렷이 적힌 첫 엔지니어이기도 합니다. 1982년 조용필 4집의 Recorded By 와 Remix, 1983년 5집 노트의 “기획: 임석호 녹음: 이태경 커팅: 장인석”, 1982년 송골매 II 와 1988년 신촌블루스 1집의 Mixed By. 전부 지구레코드 음반이에요. 장인석은 송골매 II 의 Mastered By 와 신촌블루스 1집의 Recorded By 에도 있어서, 1980년대 지구에서 녹음·믹싱·커팅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이 두 이름이 보여 줍니다. 2011년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녹음 엔지니어 이태경” 으로 문체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2017년에는 전 레코딩협회 회장이자 서울사운드 대표로 마장동의 새 LP 공장을 두고 “LP제작에선 디스크커팅, 디스크마스터링이 중요한데, 바이닐팩토리의 기술과 LP의 품질은 단연 세계적인 수준” 이라고 평했어요.

크레디트로만 남은 이름들#

나머지는 음반 뒷면에 한 번씩 나옵니다. 한국음반스튜디오의 윤문기는 1985년 조동진 3집, 1986년 어떤날 I 과 시인과 촌장 『푸른 돛』, 1989년 이원재 1집의 엔지니어인데 두 음반에는 ‘Yoon Won-jun’ 으로 적혀 있어요. 최병철은 1984년 윤수일 밴드 III, 1987년 구창모 『感』 의 녹음과 믹싱, 이문세 4집 12인치의 녹음이고 녹음실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정도원과 박호일은 1987년 최성수 『동행』 과 1989년 양수경 2집을 같이 녹음했고, 정도원은 뒤에 MBC 아카데미의 지도교수가 돼서 최남진이 “제 음향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 이라고 부른 사람이에요. 1974년 검은나비 1집의 ‘Cho Yeong Cheol’(장충스튜디오), 1983년 김수철 1집의 정용원(장충스튜디오), 1988년 변진섭 1집의 서상환, 1989년 이병우 1집의 승흥찬이 그 밖의 이름입니다. 마장동에는 박영호가 있었습니다. 베이시스트였다가 엔지니어가 된 변성복이 2022년에 “마장동 스튜디오의 박영호 기사와 베이스 세션으로 처음 녹음을 한 적이 있는데” 녹음실이 두려우면서도 「스타워즈」 우주선 조종실로 들어가는 것 같아 처음으로 스튜디오 엔지니어라는 직업의 매력을 알게 됐다고 했어요.

임창덕은 이 시대에 시작했지만 크레디트는 1990년대부터입니다. 1957년생으로 친척인 가수 이용복의 영향으로 1970년대 후반 강남스튜디오에 들어갔고, 1980년대 초 벗님들의 「다가가기 전에」 와 「바위섬」,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을 작업했다고 2022년 스포츠한국이 썼습니다. 외인부대의 「쥴리」 를 16채널 멀티 레코더로 작업하던 어느 날 아날로그 테이프 사이에 파리 한 마리가 끼어 압사했는데 하필 그 부위가 「쥴리」 라 흔적을 못 지웠고,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살짝 지직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거기 있어요. 1989년 LA 의 레코딩 워크샵에서 1년을 보냈고, 그 뒤는 Part 3 에 있습니다. 본인 말로 스튜디오와 라이브 모두 조용필과 작업한 최초의 엔지니어이기도 합니다.

연도음반Recorded ByMixed By커팅·마스터링녹음실
1974검은나비 1집Cho Yeong Cheol장충스튜디오
1977 · 1979이정선 3집 · 4집서울스튜디오 (노트)
1982조용필 4집이태경 (Remix 겸)지구
1982송골매 II이태경장인석지구
1983조용필 5집이태경장인석 (커팅)지구
1983김수철 1집정용원장충스튜디오
1984따로또같이 II최영철서울스튜디오
1984윤수일 밴드 III최병철
1985조동진 3집윤문기(제작 김영)
1986한영애 1집최세영 (노트)서울스튜디오
1986어떤날 I · 시인과 촌장 『푸른 돛』Yoon Won-jun · 윤문기한국음반스튜디오
1986부활 1집Song Yeong HunMixed At 서울스튜디오
1987구창모 『感』최병철최병철
1987최성수 『동행』박호일 · 정도원(아세아)
1988신촌블루스 1집장인석이태경지구
1988변진섭 1집서상환(한국음반)
1989김현철 1집송형헌 (어시스턴트 노양수)송형헌 · 김현철서울스튜디오
1989이문세 6집최세영 · 도정희 · 송형현최세영
1989장필순 1집송형헌 · 최세영송형헌 · 최세영서울스투디오
1989이원재 『혼자 내리는 비』Yoon Won-jun한국음반스튜디오
1989양수경 2집박호일 · 정도원(현대)

크레디트가 없는 음반이 더 많습니다. 들국화 1·2집, 사랑과 평화 1·2집, 유재하 1집, 김현식 1~4집, 조용필 1·3·6·7·8·10집, 산울림 1집, 봄여름가을겨울 1·2집, 어떤날 II.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이라고 불리는 음반들 대부분이 누가 녹음했는지 적혀 있지 않아요.

방송과 공연, 이름이 남지 않은 자리#

1970년대와 80년대 방송 음악 프로그램의 음향 담당자 이름은 찾지 못했습니다. 「쇼쇼쇼」, 「젊음의 행진」, 「가요무대」 의 기사에 음향 담당은 나오지 않아요. 가장 이른 이름이 1996년 제8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특별상 기술 부문의 “권봉의(열린음악회 음향 담당)” 이고, 그 프로그램의 음향감독 문금주가 2008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받습니다. 둘 다 1993년에 시작한 열린음악회 사람들이라 Part 3 에서 다룹니다.

공연 쪽도 비슷합니다. 1965년생 김기영을 동아일보가 2012년에 “국내 1세대 음향디자이너” 라고 불렀는데, 1980년대 중반 뮤지컬 밴드의 키보드였다가 1990년 교육문화회관 음향실에 들어갔고 1993년 「레미제라블」 의 오퍼레이터가 된 사람이에요. 1세대의 시작이 1990년이라는 뜻이고, 그 기사 시점에도 국내 음향디자이너가 약 10명, 오퍼레이터까지 10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1980년대 조용필 콘서트의 음향을 누가 맡았는지는 기사에 없고, 임창덕이 스튜디오와 라이브 모두 조용필과 작업한 최초의 엔지니어라고 말한 것이 유일한 단서예요. 조용필·한영애·한상원의 음반을 믹싱하고 콘서트 음향감독을 800회 넘게 맡았다는 박병준도 시기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녹음실의 엔지니어가 음반 뒷면에라도 남은 것과 달리, 무대 옆에 앉았던 사람들은 아무 데도 남지 않았습니다.

자료에 대해#

이 편은 Discogs 크레디트와 회고 기사에 기댔고, 1980년대 음반의 크레디트는 열에 일곱이 없습니다. 서울스튜디오의 설립 연도는 SBS 가 1946년이라고 했고 나무위키는 충무로 설립 뒤 1975년 이촌동 이전과 1976년 16채널·1980년 24채널 도입을 적었는데, 나무위키에만 있는 연도는 쓰지 않았습니다. 들국화 1집의 채널 수는 김영(16채널)·최성원(24트랙)·최세영(24채널 최초)이 어긋나 셋을 병기했어요. 마장동 스튜디오의 개업은 오마이뉴스의 “1960년대 중반” 과 서울신문·마장뮤직의 “1968년” 이 다르고, 나훈아의 데뷔 녹음 장소는 기사와 본인이 다릅니다. 최성락(장충동 녹음실 사장)과 박영호(마장동 기사)는 기사 한 건씩이고, 송형헌·윤문기·최영철은 표기가 달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유재하 1집과 들국화 1·2집, 사랑과 평화 1집의 엔지니어는 끝내 찾지 못했어요. 이 편에 1인칭은 없고, 1970년대 이전 절은 사용자가 예상보다 자료가 많다는 보고를 받고 독립된 절로 두기로 한 것입니다.

편주제
Part 1조건과 세 세대
Part 2 (이 글)1970년대와 80년대
Part 31990년대와 2000년대
Part 42010년대 이후
Part 5계보도와 다섯 자리

References#